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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趙泰億의 使行文學 연구 : 對日觀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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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논문에서는 1711년 신묘사행의 정사 趙泰億(1675∼1728)의 사행문학을 통해 그의 대일관을 연구하였다. 1711년 신묘사행은 임란 이후 시작된 조선후기 통신사행에 있어서 시기적으로 중간...

      본 논문에서는 1711년 신묘사행의 정사 趙泰億(1675∼1728)의 사행문학을 통해 그의 대일관을 연구하였다.
      1711년 신묘사행은 임란 이후 시작된 조선후기 통신사행에 있어서 시기적으로 중간에 놓인 사행이며, 회차로는 여덟 번째 사행이다. 조태억은 정사로 일본을 사행하며 그 체험을 개인문집인 『謙齋集』6, 7, 8권에「東?錄」으로 남겼다. 그러나 『겸재집』이 미간행 문집인데다가 「동사록」이 『海行摠載』에 실리지 못해 접근성이 떨어져 사행문학 연구에 있어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의 사행문학이 여항 문인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정사로서 일본을 사행한 조태억 연구는 사행문학 연구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다. 현재까지 조태억 개인을 조망한 연구는 없었으며, 대체로 막부의 집정관으로 통신사 접대를 담당한 新井白石와 관련된 연구에서 조태억이 거론되었다.
      신묘사행은 이전 회차인 1682년 임술사행부터 조일 양국 간에 늘어나기 시작한 문화적 교류의 분위기를 타고 많은 교류의 흔적을 남긴 사행이다. 조태억도 이러한 문화 교류의 흐름에 합류하고 있었다. 제술관 1인, 서기 3인이라는 사문사 체제가 정립된 이 시기, 조태억은 정사였기 때문에 일본인과의 시문 교류에 의무가 없었지만 그의 「동사록」에는 일본인들과 교류한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이 시들 중 일부는 일본에서 간행된 필담창화집 23종에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서 일본인에게 보낸 서문과 贊, 銘이 『겸재집』내에 수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자료들에는 일본인과의 교류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조태억의 선험적 인식과 일본 각 지역에서의 견문 및 술회가 드러나 있어 조태억의 대일관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었다.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조태억이 일본을 체험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선험적 인식과 주변인들의 ?章을 통해 사행에 임하는 태도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폈다. 먼저, 조태억은 일본 사행을 새로운 유람으로 생각하고 기대했으며 주변인들도 일본의 자연 경관을 즐기고 돌아올 것을 당부했다. 두 번째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100년이 지난 시기였지만 일본이 임진왜란의 주범국이라는 것에 적개심을 지니고 사행에 임했다. 일본이 전쟁의 원흉이라는 사실은 주변인들도 잊지 못하는 터였지만, 일본에 대해 복수의 의지를 다지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과거보다 현재의 교린 상태를 중요시하여 和로써 대할 것을 당부하는 인물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조태억은 존화주의에 입각하여 일본을 이적시하며 사행에 임했다. 조태억의 주변인들도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해 이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을 지녔다. 기본적으로 조선을 오랑캐인 일본보다 우위에 두는 입장에서, 회유와 유화책으로 일본인을 대할 것을 당부하거나 인간의 본성과 감정은 같은 것이라는 이해 아래 대등하게 대해야 함을 강조했다.
      실제 일본을 체험하며 선험적 인식과 태도는 유지되거나 변형되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체험을 통한 조태억의 대일관이 형성되었다. 본고에서는 조태억의 대일관을 일본의 자연, 일본의 문물, 일본인에 대한 것으로 분류하여 살펴보았다. 먼저, 조태억은 일본의 자연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기행시와 창화시를 막론하고 일본의 승경을 찬미하였으며, 자연을 우열논쟁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일본의 것이더라도 좋으면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두 번째로 일본 문물의 장점을 포착하는데 주력했다. 임진왜란의 주범으로 여겨지던 豊臣 가문을 무너트린 德川 가문의 위업을 높이는 것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해소한 후 일본의 번화와 좋은 점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일본의 우수한 풍속을 기록했으며 중국의 제도와 비교해 우월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인에게서 교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新井白石을 만나 소통하면서 武國으로 인식했던 일본이 文을 향해 변화해가는 분위기를 느꼈고 중화로의 교화를 유도했다. 시문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인에게도 시문을 보내어 文을 통해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태억이 일본을 체험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일본에 대한 선험적 인식은 당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던 것이면서도 조태억이 속한 소론계의 일본 인식과 맥을 나란히 하는 것으로, 적개심과 이적관을 유지하면서도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태억이 실제 체험한 일본은 훌륭한 자연 경관을 지녔고 앞선 제도 등 좋은 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文에도 관심을 보이는 나라였다. 이에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태도를 지녔던 조태억은 일본에 대한 이해와 인정의 범위를 넓히고 그들에게 한 발짝 나아가 포용하려는 대일관을 보였다. 비록 중화주의나 화이관에서 탈피하거나 실학적 태도로 일본을 배우는 것에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일본에 대한 열린 자세는 선구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연구들은 대체로 위항 문사들에게 초점을 맞추었지만 정사였던 조태억도 문화교류의 일면을 차지했으며 대일관에 있어서도 상당히 포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태억 개인에게 있어서는 사대부로서 경직되지 않은 대일관을 지닌 인물이었다는 점에 그의 사행문학 연구에 의의가 있다. 한편으로 사행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홍세태·신유한 및 여항의 문인들과 함께 사행문학이 심화를 이루는데 초석을 다졌다는 것에 조태억 사행문학 연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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