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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南平壤’의 실체와 출현 배경 = The Truth of “South Pyeong’yang(南平壤)” of Goguryeo, and How the concept was for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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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is article, the traditional idea which believed that “South Pyeong’yang[南平壤]’ had been located in Seoul, the current capital of Korea, is critically analyzed. And argued here is that the idea itself was actually developed within the G...

      In this article, the traditional idea which believed that “South Pyeong’yang[南平壤]’ had been located in Seoul, the current capital of Korea, is critically analyzed. And argued here is that the idea itself was actually developed within the Goryeo people’s own viewpoint upon their own past history.
      This South Pyeong’yang only appears in records created after the foundation of Goryeo. Any reference to ‘Pyeong’yang’ that had been made during the three-dynasties period means the capital of Goguryeo. Record of NIhon Shoki(日本書紀) which documented the supposed Pyeong’yang raid committed by Baekje was not about an actual fact, but about a notion which viewed Pyeong’yang as part of Baekje’s territory, as well as an object, ‘the old land’ that would eventually have to be reclaimed. The record was also from time to time cited as a reminder that the region had later been ultimately occupied by Shilla, and also as an evidence of Shilla actually owning the region south to Pyeong’yang.
      In that regard, we can see that this South Pyeong’yang concept was necessary for the Goryeo people who claimed that Goryeo was founded on the old territory of Goguryeo, and that Goryeo was currently occupying the territories of all three ancient dynasties. Such claim would provide Goryeo with a level of legitimacy, as such claim was also based upon the notion of "Three Hans becoming one"(三韓一統意識).
      Many references and arguments were derived from this very notion. After the first Khitan invasion, Seo Hi(徐熙) uttered that northern region of Samgak-san(三角山) mountain had belonged to the Goguryeo state. And there were all kinds of tales and perceptions, which told the story of King Anjang-wang(安藏王) coming to the Han-gang river(漢江) area to meet with the beautiful lady Han(漢氏美女), or argued that Goguryeo and Baekje shared borders at the Han-gang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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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논문은 현재의 서울 지역에 고구려의 南平壤이 있었다는 전통적 견해를 비판하고, 이러한 인식이 고려의 영토의식에 의해 생성된 것임을 논한 것이다. 남평양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

      이 논문은 현재의 서울 지역에 고구려의 南平壤이 있었다는 전통적 견해를 비판하고, 이러한 인식이 고려의 영토의식에 의해 생성된 것임을 논한 것이다.
      남평양은 『삼국사기』 지리지의 註記와 도읍 변천 기사, 『세종실록』 지리지의 연혁, 고려 태조의 「庄義寺齋文」 등 고려 이후의 기록에서만 나타난다. 반면 『삼국사기』 본문에 보이는 평양은 모두 고구려 도읍을 가리킨다. 따라서 남평양의 존재를 직접 입증할 수 있는 자료적 근거는 없다.
      『日本書紀』 552년 기사에서 백제가 漢城과 함께 공략한 平壤은 남평양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구문의 내용과 문법에 비추어 백제가 공격한 평양은 고구려 도읍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이 기사는 실재한 사실이 아니라 평양까지 백제의 영토라는 의식에 따라 고토 수복을 말한 것이다. 또한 백제가 수복한 지 1년 만에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라가 점유했던 사적을 유도하여 평양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보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삼국사기』 居柒夫 열전에도 같은 맥락의 기사가 보여 이것이 신라에서 생성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후삼국 시기 견훤은 백제의 영토의식을 계승하여 평양의 수복을 천명하였다. 남평양은 이에 대응하여 고려가 고구려 땅에서 건국되었음을 입증하기 위해 생성된 것이었다. 이와 함께 당시 판도에 고구려 영토를 포함시킴으로써 삼국의 영토를 아울렀다는 것을 제시한 것으로, 三韓一統意識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후 고려는 고구려 영토가 한강까지 내려왔다는 인식을 확립하였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徐熙는 대동강 이남을 할양하려는 의견에 맞서 三角山 이북이 모두 고구려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한강 하구의 王逢縣과 高烽縣에서 고구려 安藏王이 漢氏美女를 만났다는 설화는 고구려 영토가 한강까지 내려왔음을 안장왕의 백제 원정을 이용해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무신집권기 경주의 반란 세력은 沙平渡, 곧 한강을 고려와 신라의 경계로 삼으려 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漢江을 경계로 했다는 설명은 이러한 인식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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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양기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2 김영관, "웅진시대 백제의 한강유역 영유권 연구 -문헌과 고고학 자료의 재검토를 통한 이해 서설-" 백제문화연구소 1 (1): 125-148, 2015

      3 전덕재,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지배방식" 서울역사편찬원 (73) : 99-144, 2009

      4 윤경진, "신라 興德王代 체제 정비와 金庾信 追封 ― 三韓一統意識 출현의 일 배경 ―" 수선사학회 (52) : 105-142, 2015

      5 윤경진, "신라 神武-文聖王代의 정치 변동과 三韓一統意識의 출현" 신라문화연구소 46 : 207-242, 2015

      6 윤경진, "신라 景文王의 통합 정책과 皇龍寺九層木塔의 改建 ― 9세기 三韓一統意識의 확립과 관련하여 ―" 고려사학회 (61) : 453-49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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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주보돈, "금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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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2-26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The History of Seoul -> Seoul and History KCI등재
      2016-02-03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鄕土서울 -> 서울과 역사
      외국어명 : The Hyangto Seoul -> The History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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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0-22 학회명변경 한글명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 서울역사편찬원
      영문명 : The City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Of Seoul -> Seoul Historiography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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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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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27 0.27 0.34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35 0.33 1.024 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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