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so-mun,” the ‘Secondary South Gate,’ was a Capital gate erected between the Gwang’hi-mun(光熙門) and Sung’rye-mun(崇禮門) gates, which were among the Eight gateways of the Han’yang Capital city established during the reign of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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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Namso-mun,” the ‘Secondary South Gate,’ was a Capital gate erected between the Gwang’hi-mun(光熙門) and Sung’rye-mun(崇禮門) gates, which were among the Eight gateways of the Han’yang Capital city established during the reign of F...
“Namso-mun,” the ‘Secondary South Gate,’ was a Capital gate erected between the Gwang’hi-mun(光熙門) and Sung’rye-mun(崇禮門) gates, which were among the Eight gateways of the Han’yang Capital city established during the reign of Founder king Taejo. There is no reference to this gate in records like Annals of Taejo’s Reign (which contains records of the initial establishment of the Eight Capital Gateways) or the “Geography” section in Annals of Sejong’s Reign, as well as other Law Codes or Dynastic Ritual manuals either, but we can confirm its existence by records from the days of King Yejong, during which the shutdown(閉塞論) of this secondary South gate was discussed. This was the first time this gate was mentioned in records.
Then coming into the days of king Sukjong, officials like Kim Jin-bal(金震發), Heo Jeok(許積), Gwak Je-sung(郭齊崇), An Jeong-gi(安鼎基) and others argued that this Secondary South Gate should be reopened, but their request was never heard. An Tal(安梲) suggested this again during king Yeongjo’s reign, but it remained shut down until the capital itself was damaged and destroyed by the Japanese aggressors.
Namso-mun was originally erected to facilitate traffic between the Capital and the Han-gang river. But many records and maps from the Joseon period’s latter half indicated the names and locations of Namso-mun, Gwang’hi-mun and Sugu-mun(水口門) not only differently but also erroneously, and caused some confusion in the process. Sometimes Namso-mun was mistaken as Gwang’hi-mun, and sometimes it was never even mentioned. From such instances, we can see how the people of the time actually viewed Namso-mun, and what was its status compared to other gates of the capital.
국문 초록 (Abstract)
남소문은 태조대 한양도성에 조성된 8門 중 광희문과 숭례문 사이에 건립한 문이다. 그 존재는 도성8문을 세운 최초의 기록을 담은 『태조실록』과 그 뒤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
남소문은 태조대 한양도성에 조성된 8門 중 광희문과 숭례문 사이에 건립한 문이다. 그 존재는 도성8문을 세운 최초의 기록을 담은 『태조실록』과 그 뒤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드러나지 않고 남소문의 폐쇄론을 논의하고 있는 예종대에 그 실체가 처음으로 발견된다. 법전과 국가전례서에도 남소문 관련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숙종대에 이르러 김진발, 허적, 곽제숭, 안정기 등이 남소문을 열자는 주장을 제기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영조대에 안탈이 개문론을 다시 주장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고, 일본에 의해 도성 훼손이 이루어질 때까지 폐쇄된 채 남아 있었다.
남소문의 건립 목적은 도성과 한강 사이의 통행의 편리를 위한 것이었다. 조선후기 여러 문헌과 지도에서 남소문․광희문․수구문 세 문의 명칭과 위치가 달라지는 등 혼선이 초래되었다. 남소문을 광희문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아예 그 존재조차 거론되지 않은 것에서 남소문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인식 및 다른 도성문에 비해 남소문의 위상을 드러내는 일면을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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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극선(趙克善) 일기를 통해본 17세기 전반기의 과거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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