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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2015한일관계사연구이 글은 24년의 우여곡절을 딛고 성사된 1811년 易地通信과 관련하여, 이 일이 추진되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의 시기를 집중적으로 고찰하였다. 특히 통신사 파견 과정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고 다수의 역관 희생자를 낸 1805년 사건과 관련이 많다. 현재 대마도의 對馬歷史民俗資料館에는 역지통신과 관련하여 朝日兩國의 역관이 쓴 한글서간이 남아 있다. 역관이 남긴 서간은 개인이 쓴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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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2014日本文化學報Ambivalent property of the late Joseon Dynasty Japan (Tsushima) is represented with the Tada Yojaemon condensation in double figures in Amen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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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순2013한일관계사연구본 논문은 막부의 ‘竹島(울릉도)도해금지령’이 내려진 1696년 1월부터 1699년 10월 ‘울릉도쟁계’가 최종적으로 처리되기까지, 4년여 동안 조선정부와 대마도간의 교섭과정을 검토한 것이다. 대마도가 ‘울릉도쟁계’의 종결 처리과정, 즉 4년 동안 自藩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시도의 실상을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한일관계의 특징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먼저, 대마도가 1696년 막부의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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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철희2012한일관계사연구이 논문은 1441년(세종 23) 11월에 조선 정부와 대마도주가 맺은 孤草島釣魚禁約에서 ‘고초도’의 위치를 검토한다. 고초도에서 고기잡이는 대마도 어민에게 생명줄과 같았다. 이에 대마도주 宗貞盛은 조선 정부에 고초도에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간청하였다. 그러나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조선 정부는 왜인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일환으로 고초도조어금약이 체결되었다. 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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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일2010東北亞歷史論叢Separated by seas, the three countries of Korea, China, and Japan engaged actively in interaction too in the pre-modern period. As maritime a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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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孝雲2010일어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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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종2009한일관계사연구조선초기부터 다양한 왜구대책을 실시한 결과 태종 9년을 전후하여 왜구의 침입은 감소한 반면 통교왜인은 증가하였다. 조선에서는 통교자의 증가에 따른 치안?경제상의 부담과 왜구문제에 대한 자신감, 일본의 국내 정세에 대한 지식의 확대 등을 배경으로 조선에서는 서계?도서?문인 등의 왜인통제책을 실시하였다. 이와 더불어서 통교왜인이 포소에 도착한 이후부터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왜인접대에 관한 규정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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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지은2008한일관계사연구본 논문은 조?일관계상에서의 쓰시마 조선어통사의 역사, 입지 및 역할 등에 관해 검토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일간의 외교?무역업무는 왜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언어도 문자도 다른 조선과의 의사소통과 정보수집의 최전선에 있었던 것은 조선어를 이해하고 구사할 수 있는 조선어통사였다. 이들은 조선과의 무역 등에 종사해 온 쓰시마의 특권상인인 60인 상인 출신으로 번의 필요에 따라 동원되어 통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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方琪喆2008한일관계사연구이 글은 조선 중기 사상계를 대표했던 인물인 栗谷 李珥의 대일인식을 조선과 쓰시마 섬(對馬島)간의 통상에 관한 입장, 대일국방강화론 등을 통해 구명한 것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인의 거듭된 소요사태에도 불구하고 쓰시마와의 통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율곡은 반대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 정부와 백성들이 공식적으로는 쓰시마와의 무역을 통해, 비공식적으로는 왜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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池內敏2007한일관계사연구본 연구는 朝鮮의 通信使가 일본에 가서 준 禮單을 통해 朝日外交의 성격과 그 변화를 분석한 것이다. 예단이란 다른 나라와 외교를 펼칠 때 의례적으로 교환하는 외교적 선물 즉 예물을 말하는데, 예단을 주고받는 것은 근대 이전 외교의 관행이었다. 예단의 규모는 朝鮮前期에는 변동 폭이 커서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인 朝鮮後期에 들어오면 예단 규모가 一定線을 유지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