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와집 목록
弦窩集
현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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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東野
윤동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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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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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및 일러두기
조선 시대 현와(弦窩) 윤동야(尹東野, 1757~1827)의 문집이다. 본집은 족손 병효(炳斅)가 가장유고(家藏遺稿)에 저자가 당시의 명석(名碩)들과 창수(唱酬)한 것을 모아 이근용(李根容)에게 교정과 서후(書後)를 받아 초성(抄成)한 뒤 1870년경 자신과 형 병주(抄成)의 발문을 추가하여 간행에 대비하였고, 1894년 증손 성도(成道)가 사재(私財)를 문중에 맡기면서 판각을 부탁하였으나,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과 갑오경장(甲午更張) 등으로 착수하지 못하다가 1897년에 다시 종족들이 논의하여 물력(物力)을 내어 보조하고 증손 택규(宅逵)와 족현손 주하(胄夏)의 교감을 거쳐 거창의 수목재(修睦齋)에서 목활자(木活字)로 인행되었다. 본집은 원집 6권, 부록 합 4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卷首)에는 장복추(張福樞)가 1897년에 쓴 서문과 목록(目錄)이 있다. 권3~4는 소(疏)와 서(書)이다. 소권5는 서(序), 기(記), 발(跋), 잡저(雜著)이다. 권말(卷末)에는 족손 병주(炳周)와 병효가 1870년에 쓴 초본발(草本跋), 이근용이 1865년에 쓴 서초본후(書草本後), 윤병항(尹炳恒)이 1897년에 쓴 간본발(刊本跋)이 있다.
상세해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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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集은 弦窩 尹東野(1757:英祖33~1827:純祖27)의 文集이다.
○ 本集은 著者의 族孫 炳斅가 散佚되고 남은 遺文을 抄寫하여 1870年 兄 炳周의 刪定ㆍ校勘을 받은 稿本을, 著者의 曾孫 成道가 族曾孫 宅逵와 族玄孫 胄夏의 再校를 거쳐 宗中의 協助를 받아 1897年 居昌 修睦齋에서 活字로 印行한 初刊本이다.
○ 分量은 6卷 4册으로 總 256板이다.
○ 本 影印底本은 서울大學校 奎章閣藏本(圖書番號:奎12028)으로서 半葉은 10行 20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1.8×18.0(cm)이다.
○ 本 影印底本 중 目錄은 板次 「十一」이, 卷5의 第41板과 第42板 사이에는 板次 「四」가 重複되어 있고, 卷3의 第22板은 卷次가 「二」로, 卷5의 第24板은 板次가 「二十」으로, 卷6의 第17板은 板次가 「二十七」로 誤記되어 있으며, 卷5는 板次 「四十五」가 漏落되어 있다. 그리고 卷6의 第22ㆍ30板은 狀態가 不良하여 同一本인 韓國學中央硏究院 藏書閣藏本(圖書番號:K4-6663)으로 代替하였다.
○ 本集의 標點者는 趙昌來이고 監修者는 吳圭根이다.
한국문집총간 DB에서 사용된 부호는 다음과 같다.
。 :문장 안에서 구(句)나 절(節)의 구분이 필요한 곳과 문장의 끝에 사용하였다.
묘도문이나 부(賦), 사(辭) 등에서 銘曰, 辭曰 등의 뒤에 사용하였다.
대구(對句), 연구(聯句) 등 운문의 각 구마다 원주로 저자를 표시한 경우, 각 구의 끝뿐 아니라 원주 뒤에도 사용하였다.
, :인명, 지명, 관직명, 서명 등이 나열되어 구분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였다.
[] : 저본에 없는 제목이나 본문 내용을 생성하였을 때 사용하였다.
글의 저자가 문집의 저자와 다른 경우, 제목 옆에 저자를 밝히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저본에서 작은 글씨로 구분된 按, 增 등의 글자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제목이나 원주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성격이 달라져 구분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였다.
▣ : 저본의 결자(缺字)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 어떤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는 마멸자(磨滅字)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 저본의 묵등(墨等 검게 칠해진 부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밑줄 :교감주, 난외주 등 원주를 제외한 주석의 대상이 되는 표제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림 :도식에 가까운 그림은 하단에 ‘삽도’로 표시하고, 소자(小字)로 제목을 병기하였다.
회화에 가까운 그림은 하단에 ‘삽화’로 표시하고 소자로 제목을 병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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