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매우 독특한 외교 관계가 실행되었던 시기이다. 동아시아에서 唐이 일원적 중심이 되었던 전 시대와 달리 漢族 국가인 宋이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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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2
學位論文(博士)-- 高麗大學校 大學院 : 韓國史學科 2012. 2
2012
한국어
서울
Savages and the great suzerain : Koryo dynasty's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Khitan Liao
253 p. ; 26 cm
지도교수: 李鎭漢
참고문헌: p. 238-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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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는 매우 독특한 외교 관계가 실행되었던 시기이다. 동아시아에서 唐이 일원적 중심이 되었던 전 시대와 달리 漢族 국가인 宋이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
고려시대는 매우 독특한 외교 관계가 실행되었던 시기이다. 동아시아에서 唐이 일원적 중심이 되었던 전 시대와 달리 漢族 국가인 宋이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면서,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왕조를 세워 새로운 覇者로 자리 잡았다. 그 속에서 고려는 주로 북방 유목 민족 왕조와 조공ㆍ책봉 관계를 맺으면서도 송과의 관계에서는 事大하는 소국의 위치를 자처하며 복수의 왕조에 대해 사대를 표방하는 형식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려는 거란 및 송과 병렬적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고 金이 거란을 멸망시켰을 때에도, 그리고 몽고족의 元이 거대 제국을 세웠을 때에도 살아남았으며,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를 함께 겪으면서도 왕조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고려 외교의 특성은 무엇이었으며, 고려는 어떻게 해서 전쟁과 화친이라는 양면적인 요소를 시의적절하게 운용할 수 있는 외교적 특성을 습득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본고는 이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작성되었으며, 고려가 만난 첫 번째 유목 왕조이자 ‘오랑캐’인 거란과의 외교 관계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고려가 거란이라는 외부 왕조의 실체를 직접 대면하게 되는 것은 거란과의 전쟁이 발발한 993년(成宗 12)이다. 그 이전에는 太祖代에 거란측의 교섭 요구가 있었지만 일정한 외교 관계가 성립하는데 이르지는 못했고, 994년이 되어서야 양국이 정식 외교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태조대에서 993년에 이르는 기간을 국교 성립 이전시기로 분류하여 II장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 장에서는 먼저 고려 초 거란의 통교 의사 전달과 이에 대한 고려의 반응을 검토하겠다. 태조대 만부교 사건 이후 양국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는데, 이후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기년호와 거란 지칭 표현을 분석하여 태조대의 거란 정책이 유지되고 있는지의 여부와 함께 고려의 對거란 인식에 대해 살펴보겠다.
다음으로 成宗代에 고려와 거란 간에 국교가 성립되는 과정과, 고려가 이 생소한 외교 상대에 적응하기 위해 보인 여러 노력들을 하나로 묶어 설명해 보려 한다. 따라서 III장에서는 성종대 거란의 통교 요구와 전쟁, 그리고 종전 협약으로 체결된 地界劃定에 대해 살펴본 뒤 거란과의 외교 질서에 적응하여가는 고려의 여러 모습들을 정리할 것이다.
성종대 전쟁이 끝나고 양국 간에 조공ㆍ책봉 관계라는 일정한 양식의 외교 관계가 성립하였지만 재삼차 전쟁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양국의 견해 차이를 논의할 수 있는 외교의 장이 아직 완전하게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이 직접적인 무력으로 표출되어 해소되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든 거란과의 관계가 지속되면서 고려는 앞선 시기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 차례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등 거란을 대하는 방식을 조금씩 익혀갔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각국은 상대국이 원하는 외교 질서와 자국이 원하는 질서가 충돌하는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에 유의하여 IV장에서는 거란과의 2ㆍ3차 전쟁의 원인과 종전 과정을 외교사의 측면에서 검토해 보겠다. 아울러 1022년에는 顯宗이 거란으로부터 처음으로 책봉을 받게 되고 또한 사절 파견과 관련된 구체적인 지침이 거란으로부터 전달되었는데, 그 지침의 내용과 이것이 양국 외교사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살펴 보고자 한다.
V장은 德宗代에서 宣宗代에 이르는 시기를 다루도록 하겠다. 이 시기에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위치한 거란의 거점 문제를 두고 그들과 갈등을 겪게 되는데, 고려가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 역시 시간이 지나며 갈등이 거듭될수록 발전되어 갔다. 고려가 거란에 전달한 외교 문서들을 중심으로 고려의 갈등 해결 전략을 조명해 보겠다. 아울러 이 기간 동안에는 양국 간에 성립된 책봉관계 역시 상당히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고려와 거란이 명실상부한 책봉국-피책봉국 관계를 유지하였다는 점을 지칭 표현과 기년호를 통해 정리하려 한다.
肅宗代 이후에는 여진 세력이 흥기하면서 고려와 거란 모두 상대국보다는 여진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양국 외교 관계와 관련된 기록은 전에 없이 풍부하여 양국 관계는 물론 이를 포함한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의 특성을 짐작하게 하는 기록들이 적지 않다. VI장에서는 이러한 기록들을 함께 묶어 거란 쇠퇴기 동북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분석하고, 아울러 거란의 쇠퇴로 인해 고려의 기년 방식이 변화하는 양상을 금석문 자료를 통해 살펴보겠다.
결론에서는 태조대에서 인종대에 이르는 긴 기간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외교 관계를 검토하면서 추출해 낸 고려의 對거란 외교의 특징들을 요약해 보겠다. 가장 큰 특징은 양국 외교 관계에서 수행되었던 여러 규정들이 단번에 수립되거나 혹은 典範으로 삼아 참고할만한 구체적인 선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국교가 성립된 초기에 미처 예상할 수 없던 문제와 갈등이 외교 관계가 지속됨에 따라 제기되었고 이를 해소해가는 과정에서 고려가 對거란 외교를 수행하는 일정한 관례가 성립되어갔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을 거쳐 고려는 외부 왕조와의 갈등을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해소하거나 조정하는 여러 가지 실무적인 방법을 익혀갔으며 그 중 가장 주요하게 활용된 것은 1차 전쟁 후에 체결된 지계획정이었다는 점이 재확인 될 것이다. 아울러 세부적인 외교 실무에 해당하는 몇몇 관행도 새롭게 조명되리라 예상한다. 지칭 표현과 기년호 분석을 통해서는 고려와 거란 간의 외교 질서가 외교에 그치지 않고 고려 내부로 수용되었던 점도 확인될 것이다. 또한 고려-거란의 외교 관계를 통해 고려가 외부 세계와 외교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한 이해의 폭이 조금이나마 넓혀지고, 나아가 거란 쇠퇴기 고려-거란-송의 관계를 통해 당시 동북아시아 사회에서 통용되던 외교 질서의 단면이 드러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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