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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開港期 朝鮮의 國際關係와 反從屬論 = International diplomatic relations of Chosun dynasty in the Opening Period and assertion of Nonvassalage to Ch'ing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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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8988492

      • 저자
      • 발행사항

        서울 : 단국대학교, 1993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 사학과 한국사전공 1993

      • 발행연도

        1993

      • 작성언어

        한국어

      • 주제어
      • DDC

        951.902 판사항(20)

      • 발행국(도시)

        서울

      • 형태사항

        viii, 226 p. ; 26 cm.

      • 일반주기명

        권두 국문요약 수록
        Abstract : p.223-226
        參考文獻 : p.21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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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조선과 중국과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관계를 떠나서 문화적, 강제적, 그리고 가끔 군사적 결속까지를 도모한 친밀한 관계였다. 高麗 후기 元의 침입, 조선 후기 淸의 침입 등으로 中國 漢族이...

      조선과 중국과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관계를 떠나서 문화적, 강제적, 그리고 가끔 군사적 결속까지를 도모한 친밀한 관계였다. 高麗 후기 元의 침입, 조선 후기 淸의 침입 등으로 中國 漢族이 아닌 北方 民族에게 군사적, 정치적 간섭을 받아 從屬性을 띄게 되였다. 그러나 對元 關係에서는 강한 자주의식으로 자주성을 회복하였고, 淸나라와의 관계는 다만 朝貢관계만 유지되었을 뿐. 원나라의 간섭파 같은 군사적 강압이나 정치적 압력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朝貢관계도 점차 시대의 흐름에 따라 후퇴하여, 17세기 중엽 청나라의 침입 직후에는 연평균 4.5회이던 것이 19세기 후반에는 연간 1.6회 정도의 낮은 비율로 감소피었다.
      19세기 이후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진출하면서 조선에 수호 통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의 鎖國政策의 리에 부딪혀 통상이 어려워지자 한·중 관계를 이용하여고려하여 중국의 중재를 희망하였다. 이때마다 중국은, '朝鮮은 自主 獨立國이다. 또는 政敎禁令은 自主하기 때문이 간여할 수 없다'고 하며 세양 세력의 접근을 간접적으로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에는 간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에 의해 강압적으로 개국된 이후 서양 제국과의 통상이 이루어지고, 명치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그 후 1871년 청나라와 수호조규로 청국과도 통상하게 되었으나 실제로 가장 인접한 朝鮮과의 통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조선에 접근하였다. 한 때 정한론까지 거론ㄷ뇌었으나 무리한 정책은 온거파에 의해 진정되고 대신 강경한 수교 노력이 추진되었다.
      수교 과정에서 두 가지 난관이 있었다. 첫째는 조선의 鎖國政策이요, 둘째는 청의 보호막 역할 즉, 조션의 屬邦論이었다. 첫번째 조선의 쇄국정책은 소위 雲陽號 사건을 의도적으로 일으켜 무력을 앞세워 조약 체결을 유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대조선 보호막인 屬邦論은 일본이 신중하게 풀어나가야 할 과제였다. 그리하여 駐淸 일본 公使와 중국 정부(총리아문, 이홍장)간의 끈질긴 대화와 논쟁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淸·日 修好條約에서 언급된 상호 '所屬邦土'에 대한 侵越하지 말것을 약속한 사실이 爭點으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발생한 논쟁이 所屬邦土 논쟁이다.
      중국의 종속론 주장에, 일본측은 조선에 대한 중국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責任論까지 거론하면서 反從屬論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결국 국제적 분위기의 변화, 일본의 강한 수교 의지, 조선에서의 개화 세력의 등장 등이 데 작용하여 중국도 할 수 없이 수교를 종용하게 되었고,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중국은 일본의 조선 진출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조선에 대한 미온적 태도를 일변하여 조선에 대한 종속론 주장을 강화시켜 나갔다. 조선이 일단 일본에 의해 개국되자 중국이 비록 어느 정도 朝日修交를 권장 하였으나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때 일본의 침략적 태도가 점차 들어나자 개항 이전의 중국의 외교 전략은 러시아 견제가 핵심 목표였으나, 이제는 일본까지 견제하는 전략으로 대체되었다. 외교 정책의 변화에 따라 서양 세력을 조선에 끌어들여 옴으로써 일본을 견제하고자 함이었다. 이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도 거의 동시에 조선과의 통상을 위해 접근하였다. 이러한 급변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대조선 수교를 중재하게 되었는데, 역시 중국의 屬邦論이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로 등장하였다. 조약 조문의 제1조에 屬邦 관계를 명시하자는 중국측 주장에, 미국의 反從屬論이
      거세게 일어나 조약에는 절대로 삽입할 수 없다는 강경 자세에 부및혀 결국 조약문에서는 제외시키고, 그 대신 조선측에서 미국 국무성에 屬邦관계를 조회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그 후, 영국, 독일 등도 미국에 바로 이어 조선과 수교를 하였다. 이때 중국은 스스로, 屬邦論 주장이 미국과의 수교 때와 마찬가지로 수용되지 않으리라고 예상하고 아예 조·미조약과 동일한 조약문을 택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이들 국가들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屬邦論 주장을 조약상에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는 중국의 중재 없이 獨自的으로 수교하는데 성공하였고(1884), 상호 우호적 교류만 강조했을 뿐 역시 조선의 속방 관계는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는 서양 국가들 가운데 가장 일찌기 조선에 접근한 나라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대조선 접근은 다른 나라의 통상 요구와는 달리 조선인의 생활 관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天主敎 전파가 주된 목적이었고, 또한 1866년 丙寅洋擾를 일으켜 조선에 만행을 저지른 역사가 저해 요소로 작용하여 가장 늦게 수교하였다(1886). 朝.佛條約 역시 중국의 속방론은 수용되지 않았다.
      러시아, 프랑스 등과의 수교는 중국의 종속론 주장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일면을 보였다. 오히려 자주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세우는 결과가 되었고, 또한 서양 제국이 조선과의 수교를 추진하는 것은 중국이 비록 속방론을 주장하고 있으나, 그와는 상관없이 조선을 자주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나타내는 것이었다.
      일본 및 구미 각국과의 수교로 청국의 조선에 대한 입지가 상대적으로 약화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한 기회를 찾고 있던 때에, 조선에서 壬午軍亂이 발생하였다. 이는 대내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청은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여 위기감을 느핀 나머지 군사를 파견하여 적극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 후 청국의 간섭의 형태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군사를 동원하여 군란의 책임자로 지목된 大院君을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납치하고 군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실, 둘째 遠世凱를 조선에 주둔시켜 다방면에 걸쳐 위압적으로 조선의 內政을 干涉한 사실, 셋째 조선의 자주 외교 노력을 탄압하고 간섭한 사실로 대별할 수 있다. 이러한 청의 월권적 행위는 宗主權을 내세우며 이루어졌으나, 이로 말미암아 조선 정부의 反淸的 外交 性向이 크게 나타났으며, 조선에 와 있던 外交官들은 중국에 반기를 들고, 反從屬論을 더욱 강하게 제기하였다.
      청나라의 부당한 처사를 지켜본 미국의 외교관인 데니는 본래는 親淸的 성향을 띄었으나 결국 反淸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소위 '淸韓論'이란 논문을 표하여 중국의 宗主灌 주장과 脫法的 간섭행위를 논박하였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從屬國(a vassal state)이었다고 주장한데 대하여, 이를 논리적으로 조목 조목 반박하였다. 조선이 비록 중국에 朝貢을 바쳤다 하더라도 國際法的인 기준에서 이해할 때, 근대적 개념의 從屬國이 될 수 없다는 反從屬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獨立國이며, 중국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 행위는 說法的이며 부당한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이 개항기를 맞아 동서양 여리 나라와 수교를 하게 되자, 중국은 그 동안 형성된 전통적 한,중 관계를 이용하여 조선을 자신의 屬邦으로 주장하는 또 다른 帝國主義的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수교 과정에서 나타난 수교국들과 데니의 반종속론 주장은 중국을 곤경에 처하게 하였다. 수교국들의 침략적 의도나 통상을 위한 접근 목적, 종교적 목적, 또는 순수한 국제 관계상의 판단에서 주장한 반종속론 등 그 배경에 따라 성격의 차이가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중국의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저지하는 데에는 큰 힘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완전히 중국의 간섭을 배제한 것은 아니나, 反從屬論의 주장으로 중국의 무조건적 從屬論 주장이 허구임이 밝혀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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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Chosun Dynasty had kept an isolation policy to foreigners for centuries until early 1870s. But major foreign countries including Japan. wanted to conclude a treaty for amity and trade with Chosun. At that time, those foreign countries encountered with...

      Chosun Dynasty had kept an isolation policy to foreigners for centuries until early 1870s. But major foreign countries including Japan. wanted to conclude a treaty for amity and trade with Chosun. At that time, those foreign countries encountered with two great barriers which disturbed diplomatic relations with Chosun. The one was the anti-openig policy of Chosun Dynasty, and the other was the vassalage of Korea to Ch'ing Chma.
      Chosun had maintained a friendly relationship with China for centuries in terms of culture, morality, economy, and sometimes military. Because of the greatness and the advancement of Chinese culture, the Korean people had longed for Chinese culture. The Chosun government sometimes accepted Chinese aid when Korea was in trouble and gave a tribute to China in return. Therefore, the tribute had the meaning of mutual intercourse in terms of culture and ecomomy and stood for friendship between Korea and China.
      When Japan asked to conclude a treaty with Chosun Dynasty, the latter rejected the requirement of reopening of mutual diplomatic relationship due to the Westemized manner of Japan. Ch'ing Dynasty of China also rejected Japanese effort to come close to Chosun, because Ch'ing China reared Chosun as a vassal state. On the other hand, according to the Sino-Japanese treaty of 1871, China insisted that Japan should not infiltrate Chosun, a vassal state to China.
      Nevertheless, Japan managed to conclude a treaty with Chosun through military demonstration and by ignoring the China's assertion of vassalge of Chosun to her. At last, Ch'ing Dynasty gave advice to Chosun to conclude the treaty peacefully. The Chosun government leaders also wanted to do so. Preparing for the treaty, Japan insisted the nonvassalage of Chosun to Ch'ing and that Chosun was an independent state as well.
      A few years later,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lso gave an access to Chosun. At that time, Ch'ing China was asked to be a mediator. Ch'ing Dynasty demanded to insert an article regarding the vassalage of Chosun to Ch'ing China in the statements of the treaty. But American plenipotentiary was against the Chinese insistence because the American government opposed to the vassalage of Chosun to Ch'ing China. The King of Chosun wrote a autograph letter to Amehcan. president on the tributary of Chosun to Ch'ing by the pressure of Ch'ing government.
      Continuing to American success to conclude a treaty with Korea, England, Germany, Russia, and France succeeded in concluding treaties of amity and trade with Korea. In those treaties, an article on the vassalage of Chosun asserted by Ch'ing China was not accepted by those Westem countries.
      Ch'ing China changed her policy toward Chosun after the opening of Korea to foreign countries. Ch'ing China intervened in Korea's domestic affairs. Thereafter, the Chosun government had trouble with China because of China's intervention in Chosun affairs. The Chosun government tried to find new diplomatic policies to eliminate the Chinese intervention.
      Witnessed the brutal and criminal treatment of China, a diplomatic advisor to Korea from the U.S., Owen N. Denny wrote a thesis titled China and Corea and he criticized the China's insistence on vassalage of Korea to her. Denny's assertion of nonvassalage of Chosun to China was very logical and reasonable written on the basis of international law, international usual practices, and historical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China. The thesis gave clear-cut remarks about vassalage and much effect to many countries concerned with Korea.
      Thanks to the assertion of rionvassalage of Korea by foreign co-Jntries, China's insistence was not accepted officially by any countries, and Korea was confirmed to be an independent state. However the Chinese imperialism was to make Korea her vassalage state strongly until she was driven out of Korea in 1894. As a result, Chinese suzerainty over Korea, which had historically been claimed by China, was made clear as a fabricated theory.
      According to this historical judgement, we Koreans should make certainty of the nonvassalage of Korea to China. The vassalage was only the assertion by China one-sidedly and it is a kind of misunderstanding about Korean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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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目次 = 0
      • 國文要約 = ⅰ
      • I. 序論 = 1
      • II. 開港 이전의 朝蘇과 淸의 關係 = 10
      • 1. 傳統的 韓中關係의 理解 = 10
      • 目次 = 0
      • 國文要約 = ⅰ
      • I. 序論 = 1
      • II. 開港 이전의 朝蘇과 淸의 關係 = 10
      • 1. 傳統的 韓中關係의 理解 = 10
      • 2. 朝責質易의 退濟 = 16
      • 3. 西洋勢力의 對朝蘇 接近과 中國의 反應 = 21
      • III. 江華島 條約과 反從屬論 = 24
      • 1. 日本의 大陸侵略 政策 = 24
      • (1) 對아시아觀의 變化 = 24
      • (2) 征韓論의 擾頭 = 28
      • (3) 日本의 侵略 計劃 = 32
      • 2. 韓.日 通商條約의 推進 = 35
      • 3. 淸國과 日本間의 所屬邦土 論爭 = 50
      • 4. 江華島條約 체결과 反從屬論의 반영 = 65
      • 5. 開港 以後의 中國의 對朝鮮 政策變化 = 70
      • IV. 西洋 諸國과의 修交와 反從屬論 = 75
      • 1. 朝美修交를 위한 美國의 接近政策 = 75
      • 2. 朝.美條約의 準備와 從屬-反從屬論 대립 = 102
      • 3. 朝美條約의 特性과 影響 = 120
      • 4. 英, 獨, 俄, 佛과의 修交와 屬邦論의 처리 = 132
      • V. 淸의 千涉과 데니의 反從屬論 = 145
      • 1. 淸의 內政 千涉 = 145
      • (1) 壬午軍亂의 진압과 大院君의 幽因 = 145
      • (2) 袁世劃의 內政千涉 = 155
      • (3) 反從屬的 外交 努力과 淸의 千涉 = 162
      • 2. 데니의 反從屬論 = 169
      • (1) 데니의 淸韓論 = 169
      • (2) 淸韓論에 반영된 反從屬論 = 173
      • (3) 淸韓論에 대한 論爭 = 188
      • VI. 結論 = 205
      • 參考文獻 = 213
      • ABSTRACT =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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