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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後期 仁祖代 政治論의 分化와 變通論 = (The)split of the political theory and the theory of adaptability during the King Injo's reign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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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에서는 仁祖代의 政治史를 進步와 保守의 대립이라는 ‘發展’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주요 政治的 事件들을 서로 다른 思想과 政策의 대립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고 그 대립의 ...

      본 연구에서는 仁祖代의 政治史를 進步와 保守의 대립이라는 ‘發展’의 관점에서 파악하기 위해 주요 政治的 事件들을 서로 다른 思想과 政策의 대립이라는 시각에서 분석하고 그 대립의 논리를 추출하여 朱子學 政治論의 分化라는 측면에서 조명하여 보고자 하였다. 그것을 당시의 역사적 과제였던 國家的 위기 수습 방안과 관련하여 ‘再造藩邦’論과 ‘國家再造’論의 대립으로 그 성격을 규정하고 이를 保守와 進步의 대립으로 파악하였다. 朝鮮後期 政治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朱子學 政治思想이었다. 16세기 전반 士禍를 거치면서 16세기 후반 宣祖代에 李滉과 李珥에 의해 형성된 朝鮮 朱子學은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을 강화시키는 형태로 程朱 理學을 심화 정비한 것이었다. 仁祖反正을 주도하거나 찬조하였던 西人과 南人은 程朱 理學에 입각한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 및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제출된 朱子學 政治論인 君主聖學論을 주된 사상 경향으로 수용하는 사상적 학문적 공통 지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仁祖反正 이후 변화하는 국내외적 현실과 관련하여 朱子學 名分論과 義理論만으로는 조선왕조가 직면한 국가적 위기에 대처해 나가는 데 많은 한계를 노출하였다. 인조대 관인 유자들은 모두 주자학 명분론과 의리론을 절대적 진리로 신봉하였지만 이와 같은 심각한 국가적 위기에 부딪치자 그것만을 고집하지 않고 義理論을 汎儒敎的 차원으로 확대 해석하면서 현실에 적합한 대처 방안을 모색하고, 정치적 행동으로 표출하는 사람들이 속속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내세운 것이 바로 變通論이었다. 그리하여 朱子學 政治論이 義理論과 變通論이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분화되었다. 이러한 대립은 인조대 발생한 주요 정치적 사건에서 드러났다. 먼저 反正의 명분과 현실의 괴리, 정권의 정통성 문제 등을 둘러싸고 정치적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주자학 정치론은 분화되었다. 仁城君 李珙의 처벌을 논의하는 과정에서는 道德的 名分主義와 政治的 現實主義로 서로 대립하였으며, 이러한 논란은 政局運營論으로 확대되어 朋黨 肯定論과 朋黨 打破論의 대립으로도 표출되었는데 여기에는 義理論과 變通論의 대립이 그 저변에 깔려 있었다. 仁祖는 자신의 生父 定遠君을 元宗으로 追崇하여 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는 程朱學의 名分論과 義理論에 기초한 臣權論에 맞서 孔孟 儒學과 孝治論에 입각한 王權論이 제기되어 왕권을 뒷받침하였다. 또한 인조대 주자학 정치론은 明․淸 교체라는 국제정세의 변동과 관련하여 만주족 왕조인 淸에 대한 대응책을 두고도 분화되었다. 主和論과 斥和論의 대립이 그것이었다. 만주족 왕조의 위협에 대하여 당시 대부분의 관인 유자들은 주자학 명분론에 기초한 中華主義 세계관을 國家 그 자체보다 중시하면서 斥和論의 입장에 섰다. 이에 대해 만주족의 위협으로 부터 國家를 유지하는 것이 保民의 관건이라고 간주한 李貴․崔鳴吉 등 主和論者들은 事勢論․名實論에 입각한 權道論으로 主和論을 정당화하였다. 이 시기 주화론의 등장은 ‘再造藩邦’論에서 진일보한 ‘國家再造’論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主和․斥和 논쟁의 저변에는 經世論을 둘러싼 變法論과 守法論의 대립이 깔려 있었다. 주화론자들은 만주족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法과 制度의 개혁을 통해 倭亂 이후 마비된 국가체제를 재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國家再造’의 차원에서 變法論을 제기한 것이다.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은 변법론과 수법론의 대립의 표현이었으며, 그것은 국가재조론과 재조번방론의 대립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인조대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李貴의 軍政變通論과 崔鳴吉의 官制變通論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國家再造論이었다. 이와 같이 인조대에는 朱子學 정치사상에 대항하는 새로운 논리가 政治論의 측면에서 분명하게 성립되어 17세기 후반 變法的 國家再造論으로서의 實學의 등장을 예고하였다. 그리고 인조대 정치사에서 드러난 破朋黨論으로서의 調劑論, 王權論, 變通論, 大臣責任論 등은 肅宗代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된 蕩平政治論의 주요 구성요소가 되었다. 또한 17세기 말 肅宗代 西人이 老論과 少論으로 분화되는 대립 구도와 사상적, 인적 계보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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