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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9세기 부산 왜관의 開市와 朝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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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7~19세기에 왜관은 부산에만 존재하였다. 왜관은 조선과 일본, 조선인과 일본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상 등 다양한 측면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왜관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관계는 왜...

      17~19세기에 왜관은 부산에만 존재하였다. 왜관은 조선과 일본, 조선인과 일본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일상 등 다양한 측면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왜관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관계는 왜관 안의 개시와 왜관 밖의 조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개시는 국가가 공적으로 인정한 무역상인이 매달 3일,8일,13일,18일,23일,28일, 즉 한달에 6번 실시하는 무역이다. 개시는 開市大廳, 開市廳이라 불리는 특정한 장소에서 행해졌다. 폐쇄된 방안이 아니라 공개된 대청에서 무역이 행해졌다. 개시는 개시무역 또는 사무역으로 불린다. 개시무역을 담당했던 조선인 무역상인을 흔히 동래상인이라 불렀다. 개시에서는 중국산 생사나 고급 비단, 조선산 인삼, 일본산 은이 주로 거래되었다.
      조시는 왜관의 정문 앞 노천에서 매일 열리는 아침시장이다. 조시에서는 쌀, 생선, 야채, 과일 등 소량의 생필품이 거래되었다. 조시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은 왜관 주변 조선인 마을에 사는 일반민이었다.
      기본적으로는 개시와 조시는 시간, 공간, 주체, 상품 등 여러 측면에서 그 성격이 다른 경제 활동이었다. 개시가 점차 쇠퇴하거나, 조시가 점차 활발해지면서, 양자의 경계는 점차 무너졌다. 조시는 일용 잡화시장에서 대규모 미곡 판매시장으로 바뀌어 갔다. 조시에 참여하는 상인도 점차 전업적인 상인으로 바뀌어 갔다. 조시에 참여하는 상인들이 왜관 안에 들어가서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 증가되어 갔다.
      잡상인과 같은 일반 상인이 왜관 안에서 합법적인 상업활동 공간을 확보하고,개시 상인의 특권을 일부 나누어 가졌다. 왜관의 안팎으로 구분되어 있던 개시와 조시의 주체가 왜관 안에서 혼재하게 되었다. 개시와 조시는 왜관에서 이루어진 양국 상인의 경제활동은 물론, 왜관 주변 지역민의 일상생활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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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economic relationship centered on the Waegwan was conducted with a focus on the open market within the Waegwan and the morning parket outside the Waegwan. The open market was a form of trade that was carried out six times a month, that is, the 3rd...

      The economic relationship centered on the Waegwan was conducted with a focus on the open market within the Waegwan and the morning parket outside the Waegwan. The open market was a form of trade that was carried out six times a month, that is, the 3rd, 8th, 13th, 18th, 23rd, and 28th. The open market was conducted at a particular place, which was the open market hall. Trade was carried out not in a closed room but a open hall. The open market was called open market trade or private trade. Joseon traders that were acknowledged to have qualifications to do open market trade were called Dongrae merchants. Chinese raw silk or high-quality silk, Josen ginseng, and Japanese silver were mainly dealed during the open market.
      The morning market was opened everyday in the open in front of the Waegwan entrance. Only small amounts of daily necessities like rice, fish, vegetables, and fruit were dealt during the morning market. The people selling goods in the morning market were normal people who lived in the Joseon villages around the Waegwan.
      The open market and the morning market were economic activities that differed in characteristic from many perspectives including time, space, main agent, and product. However, as the open market gradually declined and the morning market became revived, the boundary between the two collapsed. The morning market changed from selling everyday-use sundry goods to a large scale grain market. Even the merchants participating in the morning market changed gradually to full-time merchants. The number of merchants participating in the morning market who entered into the Waegwan to do commerce increased.
      As regular merchants like peddlers secured space for legal commerce within the Waegwan, they were apportioned some of the privileges of the open market merchants. The main agents of the open market and the morning market who were divided inside and outside the market coexisted within the Waegwan. The open market and morning market are important topics that help understand not just the economic activities of merchants of both countries that were conducted in the Waegwan, but also the daily lives of residents living around the Wae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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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시간
      • 3. 공간
      • 4. 주체[상인]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시간
      • 3. 공간
      • 4. 주체[상인]
      • 5.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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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박소은, "조선후기 호조 재정정책사" 혜안 2008

      2 김동철, "조선후기 통제와 교류의 장소, 부산 왜관" 한일관계사학회 (37) : 3-36, 2010

      3 차수정, "조선후기 인삼무역의 전개과정" 국민대 국사학과 1 : 1989

      4 김동철, "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민족문화추진회 21 : 1998

      5 양흥숙, "조선후기 동래 지역과 지역민 동향 : 왜관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2009

      6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에 참가한 商賈都中의 규모와 활동(1844~49)" 한일관계사학회 8 : 1998

      7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8 변광석, "조선후기 市廛商人 연구" 혜안 2001

      9 정성일, "조선과 일본의 銀 流通 交涉(1697~1711)" 2011

      10 정성일, "일본과의 무역" 국사편찬위원회 33 : 1997

      1 박소은, "조선후기 호조 재정정책사" 혜안 2008

      2 김동철, "조선후기 통제와 교류의 장소, 부산 왜관" 한일관계사학회 (37) : 3-36, 2010

      3 차수정, "조선후기 인삼무역의 전개과정" 국민대 국사학과 1 : 1989

      4 김동철, "조선후기 왜관 개시무역과 동래상인" 민족문화추진회 21 : 1998

      5 양흥숙, "조선후기 동래 지역과 지역민 동향 : 왜관 교류를 중심으로" 부산대학교 대학원 2009

      6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에 참가한 商賈都中의 규모와 활동(1844~49)" 한일관계사학회 8 : 1998

      7 정성일,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서원 2000

      8 변광석, "조선후기 市廛商人 연구" 혜안 2001

      9 정성일, "조선과 일본의 銀 流通 交涉(1697~1711)" 2011

      10 정성일, "일본과의 무역" 국사편찬위원회 33 : 1997

      11 송찬식, "이조후기 수공업에 관한 연구" 서울대 출판부 1973

      12 田代和生, "왜관" 논형 2005

      13 다시로가즈이, "왜관" 논형 2005

      14 김동철, "국역 전객사별등록 해제 Ⅱ, In 국역 전객사별등록 Ⅱ" 부산시사편찬위원회 2010

      15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16 森晉一郞, "近世後期對馬藩日朝貿易の展開" 慶應義塾大學 三田史學會 56 (56): 1986

      17 田代和生, "幕末期日朝私貿易と倭館貿易商人, In 德川社會からの展望" 同文舘 1989

      18 김동철, "倭館圖를 그린 卞璞의 대일 교류 활동과 작품들" 학고방 2008

      19 김동철, "19세기 牛皮貿易과 東萊商人" 부산대 한국문화연구소 6 : 1993

      20 이훈, "18세기 중엽 일본 표선에 대한 잡물(五日糧) 지급과 조・일 교섭 왜곡" 한일관계사학회 9 : 1998

      21 김동철, "18세기 중엽 이후 대일무역의 변화와 節目의 제정" 동양한문학회 33 (33): 175-214, 2011

      22 金文植, "18세기 전반 權以鎭의 對外認識" 도산학연구원 4 : 1995

      23 박소은, "17・18세기 戶曹의 倭館收稅策 변화" 조선시대사학회 14 : 2000

      24 김동철, "17세기 일본과의 교역・교역품에 관한 연구-밀무역을 줌심으로-" 국사편찬위원회 61 : 1995

      25 양흥숙, "17세기 두모포왜관의 경관과 변화" 부경역사연구소 (15) : 165-196, 2004

      26 金東哲, "17~19世紀の釜山倭館周邊地域民の生活相" 都市史硏究會 9 : 2001

      27 李尙奎, "17-18世紀 東萊府에 파견된 倭學譯官의 機能"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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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5-30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한일관계사학회 -> 한일관계사연구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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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1.5 1.5 1.3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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