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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조선시대 왕실용 부채와 선장(扇匠)의 직역 변화 및 제작실태 = Historical Changes of the Production of Royal Fan and of the Fan Craftsmen in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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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824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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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fan was a local specialty representing Joseon.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fans were given as gifts to Chinese envoys, Joseon envoys took them as gifts whenever they went to China, or the king gave them as Dano gifts. In order to supply this, t...

      The fan was a local specialty representing Joseon. Throughout the Joseon Dynasty, fans were given as gifts to Chinese envoys, Joseon envoys took them as gifts whenever they went to China, or the king gave them as Dano gifts. In order to supply this, the artisan system was reorganized from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craftsmen of the central government office were the original captain and the concubine captain, and the Seonjajang made fans in Jeolla-do and Gyeongsang-do in the region. However, two wars destroyed the system. Accordingly, in the late Joseon Dynasty, a temporary organization (dogam) was installed to hold royal rituals, and craftsmen were mobilized to produce fans. Their social situation and role changed with the times. In the 17th century, it was produced by craftsmen living in Seoul, or it was a special product of Jeolla-do or Gyeongsang-do, and it was a debt to the king. In the 18th century, royal fans were exclusive to the government office and were drafted into the book for more than 10 years to produce fans. It caused social controversy by forcing the heads of Jeolla-do and Gyeongsang-do to collect debts. From the end of the 18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the craftsmen who made royal fans with the development of the commodity economy were those who produced private products. At that time, the fans for calligraphy and painting by scholars also increased, and it was made into a product and changed to a method of selling it in the mar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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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부채는 조선을 대표하는 특산품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부채는 중국의 칙사들에게 선물로 주거나 중국에 사행을 가는 사신들이 예단으로 가져가거나 국왕이 신하들에게 단오 선물로 하사하...

      부채는 조선을 대표하는 특산품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부채는 중국의 칙사들에게 선물로 주거나 중국에 사행을 가는 사신들이 예단으로 가져가거나 국왕이 신하들에게 단오 선물로 하사하는 공예품이었다. 이것을 수급하기 위해 조선은 장인제도를 정비하여 공조에는 경공장인 원선장과 첩선장을,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외공장인 선자장을 두어 부채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이러한 장인제도가 무너져 국가적 수요에 필요한 부채를 생산할 대책 마련이 요구되었다. 이에 왕실 의례를 치르고자 설치한 도감에서는 장인을 징발하여 부채를 제작하였다. 그들의 사회적 처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17세기에는 서울에 사는 장인들이 왕실용 부채를 제작했고, 전라도나 경상도의 특산물로 국왕에게 부채를 진상하였다. 18세기 왕실용 부채는 관청에 전속되어 10년 이상 활동하던 장인들이 도감에 동원되어 부채를 제작하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수령들은 부채를 강제로 징수하도록 하였다. 18세기 말 이후 19세기에 경제적인 변화에 따라 복정제를 폐지하고 대신 국가용 부채는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매 조달하였다. 왕실용 부채를 제작하는 장인 또한 사적 생산에 종사하는 장인이 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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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최상수, "한국 부채의 연구" 한국도서출판협회 1972

      2 김일룡, "통영향토사 연구논문집" 통영문화원 2011

      3 김혁, "조선시대 지방관의 선물정치와 부채(扇)" 영남문화연구원 (15) : 97-142, 2009

      4 한희숙, "조선 전기 奉保夫人의 역할과 지위" 조선시대사학회 (43) : 51-93, 2007

      5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6 장경희, "서천부채장․홍성댕댕이장" 민속원 2012

      7 김삼대자, "부채의 기원과 변천" 국립중앙박물관 36 : 1985

      8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230" 1995

      9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202" 문화재관리국 1993

      10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101" 문화재관리국 1972

      1 최상수, "한국 부채의 연구" 한국도서출판협회 1972

      2 김일룡, "통영향토사 연구논문집" 통영문화원 2011

      3 김혁, "조선시대 지방관의 선물정치와 부채(扇)" 영남문화연구원 (15) : 97-142, 2009

      4 한희숙, "조선 전기 奉保夫人의 역할과 지위" 조선시대사학회 (43) : 51-93, 2007

      5 장경희, "의궤 속 조선의 장인" 솔과학 2013

      6 장경희, "서천부채장․홍성댕댕이장" 민속원 2012

      7 김삼대자, "부채의 기원과 변천" 국립중앙박물관 36 : 1985

      8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230" 1995

      9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202" 문화재관리국 1993

      10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조사보고서 101" 문화재관리국 1972

      11 김삼대자,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 국립무형유산원 2017

      12 "通文館志"

      13 "萬機要覽"

      14 "經國大典"

      15 "每日新報"

      16 今村鞆, "朝鮮風俗資料集說" 朝鮮總督府中樞院 1937

      17 "朝鮮王朝實錄"

      18 "日省錄"

      19 "完山誌"

      20 吳淵甲, "全北地方特産物製造業의 育成을 위한 經營分析(扇子製造業編)" 전북대학교 11 : 1969

      21 "備邊司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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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5 학회명변경 영문명 : Tongyang Kojon yonguso of HANSEO UNIVERSITY -> INSTITUTE FOR EASTERN CLASSIC STUDIES KCI등재
      2013-01-01 평가 등재 1차 FAIL (등재유지) KCI등재
      2010-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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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54 0.54 0.6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4 0.52 1.407 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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