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KCI등재

      창주滄洲 박돈복朴敦復의 학문과 현실인식 = Chang Ju Park Don-bok’s Reality Awareness and Study

      한글로보기
      • 내보내기
      • 내책장담기
      • 공유하기
      • 오류접수

      부가정보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Changju(滄洲) Park Don-bok(朴敦復, 1584~1647) was a person who lived in the era of King Seonjo, Gwanghaegun, and Injo. He witnessed an unprecedented war, Imjinoeran, in his childhood, and faced another war, Byeongjahoran, with every part of his b...

      Changju(滄洲) Park Don-bok(朴敦復, 1584~1647) was a person who lived in the era of King Seonjo, Gwanghaegun, and Injo.
      He witnessed an unprecedented war, Imjinoeran, in his childhood, and faced another war, Byeongjahoran, with every part of his body in his middle years. He was born in Yeongjae, Gyeongbook, led his life reading books and cultivating his mind for about 40 years, started his official career in his forties, performed his duties as a government official faithfully, came back to his hometown, Yeonghae, in his sixties, and then completed the secluded life he had pursued. The basic tendency of Park Don-bok’s political party was Namin. Yet, he smoothly associated with figures in Seoin, such as Taekdang(澤堂) Lee Sik(李植), participating in Sugye (修稧) and so on. It seems that he could maintain these relationships because of his political neutrality not biased by the position of his political party. At the time of Byeongjahoran, Bak Don-bok took the line of Cheokhwa (anti-Manchu) party in the same position of Cheongeum Kim Sang-heon. His political line was criticized later that he had failed to face the reality properly, and that he had not kept up with the international circumstances. However, the reason why Park Don-bok was willing to fight against Ching to the end at that time seems that the Confucian ideology of Gyeonwichimyeong (sacrificing oneself when one’s nation is in crisis, 見危致命) ruled his life. In an academic aspect, his stance regarding Cheonin Seongmyeonghak could be understood, and it has been found out that he preferred Daehak to Gyeonggukdaejeon as a must-read for a king to govern people with. This research is expected to become the opportunity to facilitate diverse studies on marginalized figures, and furthermore, to expand the prospect of figure study in the future.

      더보기

      국문 초록 (Abstract)

      창주滄洲 박돈복朴敦復(1584~1647)은 선조-광해군-인조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목도하였고, 장년기에는 병자호란이라는 또 하나의 전란을 온몸...

      창주滄洲 박돈복朴敦復(1584~1647)은 선조-광해군-인조조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목도하였고, 장년기에는 병자호란이라는 또 하나의 전란을 온몸으로 직면하였다. 경북 영해에서태어나 거의 40여 년 독서와 수양으로 삶을 영위하다가 불혹不惑의 나이에벼슬길에 나가서 관료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이순耳順의 나이가되어서야 다시 고향인 영해로 돌아와서 그가 추구하고자 한 은거적 삶을 완성하였다. 박돈복의 당색은 기본적으로 남인에 속한다. 그러나 택당澤堂 이식李植 등 서인계 인사들과 수계修稧하는 등 비교적 원만한 교유를 하였다.
      그가 이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색에 치우치지 않은 정치적 중립성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박돈복은 병자호란 당시 청음 김상헌과 궤를같이하며 척화파의 노선에 있었다. 그의 정치적 노선이 훗날 현실을 제대로직시하지 못했고 국제적 정세에도 너무 어두웠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결과를낳게 된다. 그러나 당시 박돈복이 후금과의 전쟁을 끝까지 불사한 까닭은견위치명見危致命의 유가이념이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학문적인 측면에 있어서 천인성명학에 대한 그의 입장을 읽을 수 있었고, 임금이 백성들을 다스림에 있어서 필독서로 여겨야 할 책으로 경국대전보다 대학을 더 선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자의 연구를 계기로 향후소외 인물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나아가 인물 연구의 지평이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1 황만기, "필사본 월천집月川集의 특징과번역의 필요성" 한국국학진흥원 (32) : 277-309, 2017

      2 "舊唐書"

      3 "白樂天詩集"

      4 황만기, "瀋陽抑留期의 文學的 所産物 「雪窖集」"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25 : 2017

      5 朴敦復, "滄洲集"

      6 金尙憲, "淸陰集"

      7 申楫, "河陰集"

      8 鄭佺, "松塢集"

      9 "晉書"

      10 "宋史"

      1 황만기, "필사본 월천집月川集의 특징과번역의 필요성" 한국국학진흥원 (32) : 277-309, 2017

      2 "舊唐書"

      3 "白樂天詩集"

      4 황만기, "瀋陽抑留期의 文學的 所産物 「雪窖集」"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25 : 2017

      5 朴敦復, "滄洲集"

      6 金尙憲, "淸陰集"

      7 申楫, "河陰集"

      8 鄭佺, "松塢集"

      9 "晉書"

      10 "宋史"

      11 "史記"

      더보기

      동일학술지(권/호) 다른 논문

      동일학술지 더보기

      더보기

      분석정보

      View

      상세정보조회

      0

      Usage

      원문다운로드

      0

      대출신청

      0

      복사신청

      0

      EDDS신청

      0

      동일 주제 내 활용도 TOP

      더보기

      주제

      연도별 연구동향

      연도별 활용동향

      연관논문

      연구자 네트워크맵

      공동연구자 (7)

      유사연구자 (20) 활용도상위20명

      인용정보 인용지수 설명보기

      학술지 이력

      학술지 이력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8 평가예정 재인증평가 신청대상 (재인증)
      202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9-08-01 학회명변경 영문명 : Korea Studies Adancement Center -> The Korean Studies Institute KCI등재
      201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
      2012-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8-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더보기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65 0.65 0.6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56 0.62 1.324 0.18
      더보기

      이 자료와 함께 이용한 RISS 자료

      나만을 위한 추천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