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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선교장의 형성과 발전 = Foundation and Development of Gangneung Seongyoj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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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314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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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강릉의 선교장은 ‘만석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지주였다. 영동지방은 물론 강원도 일대의 땅 상당부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선교장이라는 당호에 ‘莊’을 붙인 것은 장원이라...

      강릉의 선교장은 ‘만석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대지주였다. 영동지방은 물론 강원도 일대의 땅 상당부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선교장이라는 당호에 ‘莊’을 붙인 것은 장원이라는 의미이다. 선교장은 1760년대에 처음 성립된 이래로 200여 년 동안 주인의 의지와 경제적인 배경, 그리고 시대적 변화를 바탕으로 건축적인 확장과 함께 가문의 지위를 상승시켰다.
      선교장은 양반이라는 명분보다는 경제적 이익이라는 실리를 선택하였다. 선교장은 과감하게 염전의 운영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그리고 이앙법 등 새로운 농업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개간을 통하여 새로운 농지를 확대하였다. 이처럼 선교장은 명분과 체면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논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제적 논리를 바탕으로 대장원을 경영하였다.
      선교장은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가문의 지위를 단계적으로 높여서 閥閱과 동일한 수준에 이르렀다. 첫 단계로 경제력을 바탕으로 납속을 통해 空名帖을 구입하였다. 공명첩에 명시된 직위는 비록은 實職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국가로부터 합법적으로 직위를 인정받는 것이다. 1대 이내번은 공명첩의 구입을 통해 몰락 양반의 위기에 몰린 가문의 양반적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다. 관직에 나아간다는 것은 경제적인 보장뿐만 아니라 가문과 개인의 지위를 유지 발전시켜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3대 이후는 적극적인 경영으로 만석꾼의 지위에 오른 다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두 아들 이용구와 이의구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그리고 한양 재동에 60칸 주택을 구입하고 居京人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단계는 벌열가문과의 혼인하는 것이다. 婚姻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문의 지위를 상승시키거나 유지하는데 기능하였다. 4대 이용구의 아들 이회숙과 이회원은 서울에 거주하면서 서울에 거주하는 벌열가문들과 혼인하였다. 이회숙은 당시 벌열가문인 기계유씨의 사위가 되었으며, 이화숙은 반남박씨의 사위가 되었다. 당시 벌열가문과 혼인을 하는 것은 중앙의 주류사회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선교장의 지위는 경화사족의 수준으로 상승하였다.
      넷째 단계는 문집의 간행을 통해 가문의 학문적,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것이다. 선교장은 장서와 저술, 출판 등을 통해 가문의 문화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선교장은 지방에서 보기 드문 장서가로 서적의 개방을 통해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석판인쇄기를 구입하여 문집을 직접 인쇄하여 출판함으로써 학문이나 문화적 수준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과시하였다.
      마지막으로 선교장은 가문의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공익적인 의무를 실천하였다. 6대 이근우는 한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를 회생시킬 방안으로 근대학교인 東進學校를 설립하였다. 신식교육을 통해 쓰러져 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한일합방 이후에는 국가의 광복을 위해 독립자금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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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owner of Seongyojang was a big landowner who was rich enough to be called ‘Manseokggun,’ which literary means a person who owns fields yielding as much as 10,000 seok of rice. He owned large lands in Yeongdong and Gangwon-do areas, and, tellin...

      The owner of Seongyojang was a big landowner who was rich enough to be called ‘Manseokggun,’ which literary means a person who owns fields yielding as much as 10,000 seok of rice. He owned large lands in Yeongdong and Gangwon-do areas, and, tellingly, the ‘jang’ whose meaning is a manor was added to the name of the house Seongyo. Seongyojang was established in the 1760s and developed and expanded through the owners’ resolution and economic background in conjunction with the changes by time period over 200 years.
      Seongyojang pursued practical interest over rationale of Yangban class. It accumulated a fortune from even running saltpan business, which was not considered to be a decent one. It also expanded landownership of the farming field through irrigation and agribusiness. It established a big manor and managed it by means of business mind and logic rather than social ethics of rationale and decency required to Yangban class.
      With wealth and fortune accumulation, Seongyojang raised the family status step by step to the level of a meritorious family clan. The first step it took was the purchase of ‘ Gongmyeongcheop.’ The position manifested in ‘Gongmyeongcheop’ was not a real one but significant enough to be legitimately recognized by the government. The first generation of Seongyojang Lee Nae-beon solidified his family clan as Yangban class through the purchase of ‘ Gongmyeongcheop.’ The second step was entering into state ranking officials through the state examination, ‘gwageo.’ Becoming a state ranking official was the best way to obtain economic security and establish and upgrade social status of an individual and family unit. After having established the status of ‘Manseokggun’ during the first three generations, Seongyojang family began to take ‘gwageo,’ only to fail. Finally, the fourth generations Lee Yong-gu and Lee Ui-gu passed ‘gwageo’ and entered the officialdom. They bought a big house of 60 rooms in the capital Hanyang and began to live as its residents.
      The third step was the marriage to families of political power, which was a convenient means of increasing status of oneself and the whole family. Lee Yong-gu’s two sons, Lee Hoe-suk and Lee Hoe-won, married to some families of political power in the capital city. Lee Hoe-suk married to a daughter of the Yoo family of Gigye, while Lee Hoe-won to the Park family of Bannam. Through these marriages, Seongyojang was able to raise its family status to the level of ‘Gyeonghwasajok,’ the gentleman class of Seoul and its suburbs.
      The fourth step was ostentation of the family’s academic and social status through the publication of family’s anthology. Seongyojang made an effort to improve the family’s cultural status by publishing collection of works. With a vast collection of books, which was rare to a local family, Seongyojang opened its study to the public and became correspondent with scholars. It even printed anthology and published it, boasting that it reached a high level of scholarship and culture.
      Lastly, Seongyojang fulfilled public good appropriate to the family’s social status. The sixth generation Lee Geun-woo established a modern-style Dongjin School with an ambition of revitalization of its homeland at the turn of the century. The main intention of establishing the school was to raise the talented young generations with new education in order that they would keep their homeland from falling. This family also financed the Korean restoration movement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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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요약
      • Ⅰ. 머리말
      • Ⅱ. 선교장의 가계와 유래
      • Ⅲ. 선교장의 경제적 기반 형성
      • Ⅳ. 선교장의 관직 진출과 혼맥 형성
      • 국문요약
      • Ⅰ. 머리말
      • Ⅱ. 선교장의 가계와 유래
      • Ⅲ. 선교장의 경제적 기반 형성
      • Ⅳ. 선교장의 관직 진출과 혼맥 형성
      • Ⅴ. 선교장의 경영철학과 발전
      • Ⅵ.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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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김봉렬, "한국건축이야기 2, 앎과 삶의 공간" 돌베개 2006

      2 성기희, "선교장의 유래" 관동대학교 12 : 1981

      3 차장섭, "선교장, 아름다운사람 아름다운 집 이야기" 열화당 2011

      4 김영봉, "강릉 선교장" (겨울) : 2011

      5 이기서, "강릉 선교장" 열화당 1996

      6 "鰲隱遺稿"

      7 "鏡農遺稿"

      8 이겸로, "舊韓末 石版印刷 略考" (6) : 1974

      9 徐炳沛, "朝鮮後期 江陵地方의 士族支配秩序와 經濟問題" 祥明大學校 大學院 1997

      10 "完山世稿"

      1 김봉렬, "한국건축이야기 2, 앎과 삶의 공간" 돌베개 2006

      2 성기희, "선교장의 유래" 관동대학교 12 : 1981

      3 차장섭, "선교장, 아름다운사람 아름다운 집 이야기" 열화당 2011

      4 김영봉, "강릉 선교장" (겨울) : 2011

      5 이기서, "강릉 선교장" 열화당 1996

      6 "鰲隱遺稿"

      7 "鏡農遺稿"

      8 이겸로, "舊韓末 石版印刷 略考" (6) : 1974

      9 徐炳沛, "朝鮮後期 江陵地方의 士族支配秩序와 經濟問題" 祥明大學校 大學院 1997

      10 "完山世稿"

      11 "全州李氏孝寧派家譜"

      12 조용헌,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 푸른역사 2002

      13 서병패, "19세기 양반층 토지소유 상황에 대한 연구–강릉 선교장의 추수기를 중심으로-" 상명대학교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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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20-12-01 평가 등재후보로 하락 (재인증) KCI등재후보
      2017-03-07 학회명변경 영문명 : The Academy of Korean ->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KCI등재
      201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계속평가) KCI등재
      2016-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계속평가) KCI등재후보
      2013-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기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2011-01-01 평가 등재후보 탈락 (등재후보1차)
      2009-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FAIL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8-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7-05-15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Jangseogak -> JANGSEOGAK KCI등재후보
      2007-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유지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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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0.86 0.86 0.7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66 0.67 1.505 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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