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高麗世系
고려의 선대는 역사기록이 없어 상세하지 않다. 『태조실록(太祖實錄)』 『태조실록』 제2차 거란(契丹) 침입 후 수찬관(修撰官) 황주량(黃周亮)이 주저(周佇)․윤징고(尹徵古)․최충(崔冲) 등과 함께 현종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칠대실록(七代實錄)』 36권 가...
-
이제현李齊賢의 논평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충선왕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태조께서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도 그 도량과 인격이 응당 송나라 태조(太祖)보다 덜하지 않았을 것이다. 송나라 태조는 주나라 세종(世宗)을 섬겼는데 세종은 현명한 군...
-
이제현李齊腎의 논평
이제현은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우보(羽父) 우보 이름이 휘(翬)이며, 노나라 은공(隱公) 때의 공자(公子)이다. 처음 은공에게 환공(桓公)을 죽이고 태재(太宰)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도리어 환공에게 참소하여 은공...
-
이제현李齊腎의 논평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정종은 임금의 존귀한 몸으로 10리나 떨어진 사원까지 걸어가서 불사리(佛舍利)를 안치했고 또 7만 석이나 되는 곡식을 승려들에게 하루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도 한번 하늘의 견책을 받자 제 정신을 잃고 병들...
-
이제현李齊腎의 논평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광종이 쌍기(雙冀)를 등용한 것은 현인을 씀에 기준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쌍기가 과연 현인이었다면 어찌 임금을 착한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참소를 믿어 형벌을 남용하는 것을 막지 못했는가? 과거를 설...
-
이제현李齊腎의 논평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등문공(滕文公)이 정지(井地) 정지 중국 하․은․주나라 때 실시되었다는 정전제(井田制)에서 구획된 토지인 정전(井田)을 말한다. 사방 9백묘의 토지를 1리(里)로 정하고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중앙의...
-
이제현李齊賢의 논평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단을 설치했으며, 교육 재정을 확충해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를 보여 어진 이를 등용했다. 지방 수령을 독려해 백성들을 구휼했고 효자와 열녀들에게 선물을 보내 미풍양속을 진작시켰다. 손...
-
이제현李齊賢의 논평
이제현(李齊賢)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경보(慶父) 경보 이름이 공중(共仲)이며,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장공(莊公)의 친동생이다. 불의한 방법으로 노나라의 제후가 되려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莒)지역으로 달아났다가 자살하였다.는 ...
-
이제현李齊賢의 논평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최충(崔冲)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월나라 임금 구천(句踐) 구천 중국 춘추시대 월왕(越王)의 이름이다. 구천(句踐)이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를 죽이자 ...
-
이제현李齊賢의 논평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충렬왕 때 두타산인(頭陀山人) 이승휴(李承休)가 지어 바친 『제왕운기(帝王韻紀)』 『제왕운기』 충렬왕 13년(1387) 이승휴(李承休)가 오언시와 칠언시로 지은 역사시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