琴川集 目錄
琴川集
금천집
琴川集
琴川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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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時修
정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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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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解題和凡例
조선 시대 금천(琴川) 정시수(鄭時修, 1601~1647)의 문집이다. 본집은 후손들이 집일ㆍ편차한 고본을 1904년 곽종석(郭鍾錫)과 윤주하(尹胄夏)의 교정을 거쳐 저자의 9대손 규동(圭東) 등이 1907년 활자로 인행한 초간본이다. 본집은 세계도, 연보, 원집 2권 합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수에 1907년에 이만도(李晩燾)가 쓴 서(序), 목록, 세계도, 연보가 있다. 권1은 시로 1646년에 자경의 의미로 지은 〈자조(自嘲)〉, 1637년에 왕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자 충분을 토로한 〈한야억초수(寒夜憶楚囚)〉, 오덕홍(吳德泓), 정이도(鄭以度) 등을 애도한 만시 등이 있다. 권2는 서(書), 서(序), 기(記), 전(傳), 설(說) 등이다. 그중에서 〈문산천험고(問山川險固)〉는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는 것은 산천의 험고에 달린 것이 아니며, 덕을 닦아 인화를 이루는 것이 선무임을 강조하고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돌아보지 못하는 현실을 질책하였고, 부록으로 양천익(梁天翼)이 지은 행장, 종7대손 종덕(宗悳)이 지은 묘표, 이헌경(李獻慶)이 쓴 영천사상향문(瀯川祠常享文)이 있다. 권말에 종8대손 재선(載善)이 쓴 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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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集은 琴川 鄭時修(1601 : 宣祖34 ~ 1647 : 仁祖25)의 文集이다.
○本集은 著者의 後孫들이 輯佚ㆍ編次한 稿本을 1904年 郭鍾錫과 尹胄夏의 校正을 거쳐 著者의 9代孫 圭東 등이 1907年 活字로 印行한 初刊本이다.
○分量은 2卷 1册으로 總 79板이다.
○本 影印底本은 서울大學校 奎章閣藏本(圖書番號 : 奎12064)으로서 半葉은 10行 22字이고 半郭의 크기는 24.2×17.7(cm)이다.
○本 影印底本은 目錄의 第4板과 第5板은 錯簡되어 있어 바로잡았고, 年譜의 第6板은 板次가 漏落되어 있으며, 卷2의 第1 ~ 12板은 卷次가 「1」로, 第32板은 板次가 「30」으로 誤記되어 있다. 그리고 卷2의 第6板은 板次가, 第17ㆍ19ㆍ21ㆍ24ㆍ27ㆍ29ㆍ31ㆍ33板은 卷次가 漏落되어 있다.
○本集의 標點者는 李承昌이고 監修者는 鄭太鉉이다.
한국문집총간 DB에서 사용된 부호는 다음과 같다.
。 :문장 안에서 구(句)나 절(節)의 구분이 필요한 곳과 문장의 끝에 사용하였다.
묘도문이나 부(賦), 사(辭) 등에서 銘曰, 辭曰 등의 뒤에 사용하였다.
대구(對句), 연구(聯句) 등 운문의 각 구마다 원주로 저자를 표시한 경우, 각 구의 끝뿐 아니라 원주 뒤에도 사용하였다.
, :인명, 지명, 관직명, 서명 등이 나열되어 구분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였다.
[] : 저본에 없는 제목이나 본문 내용을 생성하였을 때 사용하였다.
글의 저자가 문집의 저자와 다른 경우, 제목 옆에 저자를 밝히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저본에서 작은 글씨로 구분된 按, 增 등의 글자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제목이나 원주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의 성격이 달라져 구분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였다.
▣ : 저본의 결자(缺字)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 어떤 글자인지 알아볼 수 없는 마멸자(磨滅字)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 : 저본의 묵등(墨等 검게 칠해진 부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밑줄 :교감주, 난외주 등 원주를 제외한 주석의 대상이 되는 표제어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그림 :도식에 가까운 그림은 하단에 ‘삽도’로 표시하고, 소자(小字)로 제목을 병기하였다.
회화에 가까운 그림은 하단에 ‘삽화’로 표시하고 소자로 제목을 병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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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集名 | 著者 | 出版年 | 著作時代 | D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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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집(琴川集) | 정시수(鄭時修) | - | 朝鮮時代 中期 | 韓國歷代文集DB |
간옹집(艮翁集) | 이헌경(李獻慶) | 1795 | 朝鮮時代 後期 | 韓國文集叢刊DB |
향산집(響山集) | 이만도(李晩燾) | 1946 | 大韓帝國 | 韓國文集叢刊DB |
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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