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고려중기에 새롭게 등장한 童子文 청자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현전하는 유물의 기종 및 문양의 분석을 통해 동자문 청자의 성격 및 의의를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특히 ...
본 연구는 고려중기에 새롭게 등장한 童子文 청자를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현전하는 유물의 기종 및 문양의 분석을 통해 동자문 청자의 성격 및 의의를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특히 도상의 분석을 통해 당시 활발하게 유입되고 있었던 중국의 문물, 특히 회화 유입에 따른 영향이 있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동자문은 어린 아이의 형상을 나타낸 장식 문양을 지칭하며 12세기 경 고려청자에 시문되기 시작하여 14세기까지도 지속된다. 동자문의 등장은 동시기 중국에서 널리 확산되고 있었던 동자 이미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중국에서 동자 이미지는 고대부터 등장하나 독립적으로 표현의 대상이 된 것은 당대 이후로, 송대에 이르면 더욱 확산되어 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활용된다. 동자의 외형 이미지는 서방의 ‘putti’ 이미지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되어 불교에서 연화화생 개념의 새로 태어난 영혼을 시각화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당시 사회에서 중요시되었던 자손 번영과 득남에 대한 염원의 가치관에 따라 상서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당시 칠석절에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여성들이 ‘磨喝樂’이라 칭하는 작은 동자상을 구매하는 풍습은 이러한 현상의 일면을 보여준다. 즉, 서방에서 유래하여 불교 미술과 더불어 발전한 동자 이미지는 당시 사람들의 현세적인 가치관에 따라 상징이 부여되고 보편적인 도상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시류 속에서 동자문 자기는 송·금대에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는데, 북송 후기~금대의 정요, 요주요, 자주요, 경덕진요가 대표적이다. 경덕진계 동자문 청백자의 경우 대량생산된 무역 상품으로서 고려의 유적에서도 다량 발견되어, 고려에 동자 이미지에 대한 폭넓은 선호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고려에서는 동시기 중국의 가치관과 같이 아이가 선천적으로 갖추는 긍정적 성질을 소중히 여겼으며, 그러한 성정을 간직하고 바르게 키워내는 것이 하나의 임무였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 따라 길상 의미를 갖는 동자 장식은 고려 사람들의 공감대에 호응하여 어렵지 않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라 이해된다.
고려시대의 동자문 청자는 고려중기 가마 중에서도 강진 용운리, 사당리 그리고 부안 유천리 요장에서 한정적으로 출토되며, 보령 원산도, 마도 해역, 진도 명량대첩해역의 해저 유적과 곤릉, 고려 궁성, 강화 월곳리·옥림리 유적, 혜음원지, 남원 실상사, 울주 연자도 등의 소비지 유적에서 확인된다. 대부분 지배계층의 생활 유적으로 상류층의 수요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동자문 청자의 기종은 발, 완, 잔, 접시, 병, 주자, 매병, 사이호, 합, 뚜껑, 유병, 정병, 장고가 확인된다. 발, 접시, 잔의 경우 층위가 구분되어 출토된 용운리 출토품과 형식을 비교하였으며, 그 외에도 기형 및 문양의 양식적 특징을 고려하여 제작 시기를 고찰하였다. 문양 유형은 식물 넝쿨과 결합한 여러 명의 동자가 하나의 문양을 이룬 것을 A유형, 손에 연꽃 등을 들고 있는 동자를 독립적으로 표현한 것을 B유형, 회화 장면과 같은 배경 속에 등장하는 동자를 C유형으로 크게 분류해 살펴보았다. 기종과 문양 유형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을 정리하면, 고려중기 가장 많은 수량이 생산된 발과 접시 중 동자문은 ‘발’에 주로 시문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압출양각 기법과 기종이 가지는 상관관계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또한 압출양각 기법으로 시문된 Aa유형 연화당초+동자문의 경우에는 동일 도범 생산 편을 분류할 수 있으며, 이는 기형과도 일관성을 보이고 있어 규격화된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도상에 대해서는 A유형과 B·C유형에 해당하는 회화적 동자 도상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이미 중국에서 활발하게 사용된 장식으로, 정요·요주요 생산 동자문 자기와 유사성이 발견된다. 고려시대 압출양각 기법의 동자문 청자 생산의 성행기는 금대 정요의 압출양각 기법이 발전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으며, 또한 금대 정요의 동자문 자기는 개성 출토로 전하는 것이 있다. 이러한 도상은 국내에서 출토된 금대 동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다양한 형태로 고려에 유입된 정황을 알 수 있다. 즉, A유형의 도상은 정요 자기와 가장 유사성을 보이나 당시 유입되어 있었던 다양한 요소 중에서 고려인들의 미감에 맞게 취사선택한 결과였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포도당초+동자 도상은 요주요의 예가 있으나 생산량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으며 도자기의 문양으로는 고려에서 가장 유행하였다. 고려시대 문인들의 시에 나타나는 포도알에 대한 시적표현은 흑상감, 진사 등으로 다채롭게 표현한 청자의 포도 모습과 부합하고 있어, 그들이 감상하는 소재가 청자에 구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종 및 문양 분석에서 살펴본 액체를 담는 주자, 매병 등의 기종에서 포도당초+동자문이 큰 비율을 차지하는 현상과 포도주를 향유하는 기록을 통해 포도주를 담는 용기로 선호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후자의 경우 송대 회화와의 영향관계를 추정하였다. 고려청자의 동자문에는 송대 회화와 유사한 소재가 발견되며, Ca유형 연지동자문의 경우 북송~남송대 화원으로 활동한 소한신의 <장춘백자도>에서 일치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해당 시기는 회복된 송과의 외교관계에 따라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문물이 유입된 시기로, 송 神宗으로부터 받은 물품 중에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새긴 옥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기록은 당시 ‘嬰戲’ 도상이 공예 장식으로서 고려에 들어온 정황을 알려준다. 또한 송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문종과 적극적인 문화 발전을 추구한 예종대의 기록에는 송의 서화가 고려로 유입된 정황을 보여주는 내용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특히 문종이 고려 사람을 가르칠 畵工·塑工 등을 요청한 기록은 고려의 공예 도안에 직접적인 중국의 영향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1116년경의 畫局의 설치 또한 서화와 공통된 향유 계층을 가진 청자의 도안 제작 과정에 변화를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고려시대 동자문 청자의 시기별 경향을 1, 2, 3기로 구분하였다. 1기는 11세기 4/4분기에서 12세기 2/4분기로, 새롭게 확립된 제자 기술을 바탕으로 압출양각 기법의 동자문이 청자 문양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2기는 12세기 3/4분기에서 13세기 2/4분기이다. 동자문 청자가 가장 많이 생산 및 유통되는 시기로, 압출양각 기법의 문양 유형이 다양화되고 상감기법의 동자문 또한 다양한 기종에 나타난다. 3기는 13세기 3/4분기에서 14세기 전반으로, 상감기법의 동자문이 확산되는 동시에 문양이 흐트러지기도 하는 시기이다. 14세기 중반 경부터 동자문은 청자의 문양으로 선호되지 못하고 소멸한 것으로 본다.
고려시대 동자문 청자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계층을 수요층으로 가지며, 중국에서 길상 상징으로서 확산된 동자 장식이 이들의 취향에도 부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개는 중세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 속에서 문양의 확산과 수용의 과정을 보여주며, 특히 이미지의 재생산, 즉 ‘고려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현재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고려시대 동자문 청자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시기별 흐름의 기준을 마련하고 도상 분석의 일환으로 송대 회화 유입에 따른 영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