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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 姓氏의 歷史的 展開와 大姓八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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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5486745

      • 저자
      • 발행사항

        서울 : 東國大學校, 2020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東國大學校 大學院 史學科 2020

      • 발행연도

        2020

      • 작성언어

        한국어

      • KDC

        900 판사항(6)

      • DDC

        900 판사항(23)

      • 발행국(도시)

        서울

      • 형태사항

        iv, 197 p. : 삽화 ; 26 cm

      •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尹善泰
        권말부록: 百濟 姓氏 일람표
        참고문헌 수록

      • DOI식별코드
      • 소장기관
        • 국립중앙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우편복사 서비스
        • 동국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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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Family name(姓氏)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is the exclusive property of the royal family and nobility, and is the most representative symbol system to understand the identity of the ruling class of the ancient state. Therefore, family name(姓...

      Family name(姓氏) in the Three Kingdoms Period is the exclusive property of the royal family and nobility, and is the most representative symbol system to understand the identity of the ruling class of the ancient state. Therefore, family name(姓氏) may be a clue to explaining the structure and political structure of ancient society. The ancient East Asian countries were all using family name(姓氏). However, there is a slight difference in the way family name(姓氏) is used in each country. This is because during the process of introducing culture, a certain level of change has been made in line with the situation of countries that accept family name(姓氏). Therefore, cases of neighboring countries' use of family name(姓氏) should not be immediately applied to the way the ancient Korean Peninsula uses family name(姓氏). In other words, in order to understand the family name(姓氏) of ancient Korean society, one should refer to how neighboring countries use family name(姓氏), but consider the reasons for each country's use of family name(姓氏) and the situation they are in first.
      In ancient societies, family name(姓氏) was used by the ruling class to represent the identity of the ruling class. In the process, it is found to be unique in the way family name(姓氏) is used in Baekje(百濟). This is because Baekje(百濟) shows special family name(姓氏) use cases such as ‘Two-lettered family names(複姓)’ and ‘Great Eight Families(大姓八族)’. If we analyze the reasons for the emergence of "Two-lettered family names(複姓)," which symbolizes privileged aristocrats not seen in Goguryeo and Silla, and the historical background in which the name "family name(姓氏)" was revealed in a way called "Great Eight Families(大姓八族)," we will be able to access the meaning of "Baekje(百濟) family name(姓氏)" in society.
      This culture of use of family name(姓氏) seems to have been widely accepted in the center and periphery of the country. In the fourth century, China suffers from a chaotic society for a while. In this process, the culture of using family name(姓氏) seems to have entered the Korean Peninsula, so in order to understand the use of family name(姓氏) on the Korean Peninsula, we must keep in mind the overall aspects of East Asia, and in the process we must also understand the family name(姓氏) of Baekje(百濟).
      As we look at Baekje(百濟) family name(姓氏) in the course of Baekje(百濟)'s history development, we will organize family name(姓氏) throughout the Baekje(百濟) period and look at what role these family name(姓氏) groups were playing in society Baekje(百濟). We want to look at the reasons and background of Baekje(百濟) family name(姓氏)'s emergence, the characteristic of Baekje(百濟)'s Great Eight Families(大姓八族), the increase and decrease of family name(姓氏)-use group, and the growth of Two-lettered family names(複姓)'s with Baekje(百濟) political history in mind. Furthermore, by examining the situation of the Baekje(百濟) extinction period through family name(姓氏), we will attempt a new consideration of the Baekje(百濟) destruction.
      It is difficult to fully understand society Baekje(百濟) by family name(姓氏) alone. However, based on the political situation of Baekje(百濟), family name(姓氏) will have meaningful results. If Baekje(百濟) family name(姓氏) had emerged and declined amid the political situation of Baekje(百濟), its meaning would surely have existed. Looking at one side of society through family name(姓氏), I hope, can give a new perspective in understanding Company Baekje(百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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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대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姓氏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국가마다 稱姓의 양상과 姓氏集團의 존재양태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는 문화 유입과정에서 姓氏를 수용하는 국가의 상황...

      고대 동아시아 각국은 모두 姓氏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 국가마다 稱姓의 양상과 姓氏集團의 존재양태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는 문화 유입과정에서 姓氏를 수용하는 국가의 상황에 맞춰 일정수준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고대사회의 姓氏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의 姓氏 사용 방법을 참고하되, 각국의 姓氏 사용 이유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百濟 姓氏의 양상과 그 歷史的 전개과정도 고대 동아시아 각국의 그것들과 공통적 기반을 갖는 면도 분명 있지만, 그와는 다른 차이점도 많아 百濟 姓氏만의 독특함이 크게 주목된다.
      첫째로 百濟에서는 주변의 高句麗, 新羅와 달리 王姓 외에도 최고귀족층의 姓氏들이 매우 많이 확인된다. 高句麗와 新羅의 경우 王姓인 高씨와 金씨가 최고귀족층의 거의 대부분을 구성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각국 최고귀족층의 구성 비율에서 王姓이 압도적이다. 반면 百濟의 경우에는 󰡔隋書󰡕에 特筆된‘大姓八族’이 잘 대변하고 있지만, 泗沘期 최고귀족층의 구성에 王姓인 扶餘氏보다도 ‘大姓八族’의 활동이 더 많이 확인되고 있다. 둘째로 百濟에서는 지배층의 姓氏들이 高句麗, 新羅와 달리 그 종류가 다양하며, 특이하게도 複姓’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姓氏가 매우 많다. 셋째로 百濟에서는 姓氏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한데도 귀족에 대한 王姓의 賜姓 사례는 하나도 확인되지 않는다. 百濟의 姓氏에 나타나는 이러한 양상은 이웃한 高句麗, 新羅보다는 7세기 말 이후 古代 日本의 그것과 더욱 흡사한 면을 띤다.
      百濟의 大姓八族과 다양한 複姓에 대해서는 이미 전통시대의 史家들에게도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三國史記󰡕의 撰者도 百濟 史料를 정리하면서 百濟 姓氏의 이러한 양상에 특별히 주의하였다. 󰡔三國史記󰡕 撰者는 󰡔隋書󰡕에 나오는 ‘大姓八族’ 중에 木씨와 劦씨가 별도의 姓氏로 되어 있는 자료와 複姓으로 나오는 이 木劦씨 자료에 대해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 더 이상의 답을 내놓지 않고 의문으로 남겨두었지만, 이를 통해 󰡔三國史記󰡕 撰者들이 ‘大姓八族’이라는 百濟 지배층의 특이한 구성과 다양한 複姓의 존재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靑莊館全書󰡕, 󰡔五洲衍文長箋散稿󰡕, 그리고 󰡔海東繹史󰡕 등에 정리된 百濟의 大姓八族과 黑齒, 沙吒 등의 複姓, 그리고 難씨 등에 대한 논의는 이미 18~19세기 朝鮮의 實學者들이 百濟의 姓氏制가 갖는 독특함과 복잡한 양상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고, 이때부터 百濟의 大姓八族 및 다양한 姓氏와 複姓의 양상에 대한 실증적 연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高句麗, 新羅와 달리 百濟에서만 유독 최고귀족층이 ‘大姓八族’과 같이 다양한 姓氏 집단들로 구성되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최고지배층 외에도 지배층 전반이 姓氏를 사용하여 그 숫자가 매우 많은 점도 高句麗와 新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또 姓氏들도 高句麗와 新羅에서는 흔하지 않는 ‘複姓’으로 나타나고 있다. 도대체 百濟의 姓氏制 양상이 이웃한 高句麗, 新羅와 다르게 전개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百濟 姓氏의 歷史的 展開를 검토하면서, 이러한 의문점을 밝혀보고자 한다. 百濟 지배층의 다양한 ‘複姓’사용 양상이나 ‘大姓八族’의 성립 등은 당시 百濟의 정치체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百濟 姓氏 연구에서 미진했던 점은 첫째로 百濟는 高句麗, 新羅와 달리 稱姓을 한 지배층이 매우 다양하며, 그것도 姓氏의 대부분이 ‘複姓’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양상이 나타나게 된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검토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複姓의 분류가 가능한지 등 다양한 複姓을 범주화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둘째로 ‘大姓八族’은 백제측의 傳言이 중국자료에 남게 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 百濟 최고지배층이 王姓 扶餘氏를 제외하면 8개의 族團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大姓八族이라는 어휘는 중국측이 만들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刕(劦)’씨를 제외한 나머지 7개의 族團은 그 활동 양상이 자료에서 포착되지만, 刕씨는 어떠한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 이로 인해 초기에는 木씨와 刕(劦)씨를 木刕(木劦)로 묶어 7개의 族團으로 보았으나, 이 경우 大姓八族이라는 百濟 當代의 표현과 背馳된다. 이로 인해 木刕(木劦)씨가 木씨와 刕(劦)씨의 두 개 族團으로 分化되었다고 보는 입장이 제기되었다. 현재 後者가 통설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百濟 姓氏 分化의 실제 사례와 맞지 않는 면이 있으며, 또한 分化된 刕(劦)씨의 활동 양상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의 통설은 자료적 근거가 매우 취약하다. 따라서 大姓八族 중 刕(劦)씨는 아직도 미완의 과제였기에, 새롭게 검토한 결과 刕(劦)씨는 刕씨가 맞으며, 이는 禰가 音借된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셋째로 百濟 최고지배층이 高句麗, 新羅와 달리 王姓인 扶餘氏를 중심으로 구성되지 않고, 大姓八族으로 상징되는 다양한 族團으로 나타나게 된 정치적 사회적 원인을 추적한 연구들이 매우 부족하다. 大姓八族은 왕권의 용인 또는 왕권의 주도적인 의지 속에서 관철되고 운영되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大姓八族의 성립은 百濟 후기의 정치체제를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러한 양상을 ‘大姓八族體制’로 명명하고 그것을 정의해보았다.
      세 가지 의문점을 해결하는 것이 본고의 핵심이다. 각 의문점마다 하나의 장으로 설정해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결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百濟 사회의 특징과 멸망과정을 姓氏라는 문화적 요소를 통해 이해를 시도했기에 정치적, 문화적 측면에서 百濟 사회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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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제1장 서 론 1
      • 제1절 연구의 목적 1
      • 제2절 기존 연구의 비판적 검토 6
      • 제3절 연구의 범위와 방법 17
      • 제1장 서 론 1
      • 제1절 연구의 목적 1
      • 제2절 기존 연구의 비판적 검토 6
      • 제3절 연구의 범위와 방법 17
      • 제2장 王姓 扶餘氏와 다양한 複姓의 등장 20
      • 제1절 王姓 扶餘氏의 성립 20
      • 제2절 漢城期 姓氏의 양상과 특징 42
      • 제3절 複姓의 유형과 등장 배경 58
      • 제3장 大姓八族 체제와 그 政治的 함의 78
      • 제1절 大姓八族의 존재양태와 성립시기 78
      • 제2절 禰氏와 大姓八族의 刕氏 105
      • 제3절 王과 大姓八族과 다양한 複姓의 정치적 관계 124
      • 제4장 義慈王의 즉위와 大姓八族 체제의 동요 136
      • 제1절 義慈王의 즉위와 政變 136
      • 제2절 大姓八族 체제의 동요 143
      • 제5장 결 론 149
      • 부록 : 百濟 姓氏 일람표 156
      • 참고문헌 175
      • ABSTRACT 194
      더보기

      참고문헌 (Reference) 논문관계도

      1 李弘稙, "「百濟人名考」", 􋺷서울大 人文大學論集􋺸 1輯, 1954

      2 안정준, "「李濟 墓誌銘」", 􋺷木簡과 文字􋺸 12, 2014

      3 이근우, "「역사서 편찬」", 􋺷백제의 문화와 생활􋺸, 2007

      4 千寬宇, "􋺷加耶史硏究􋺸", 일조각, 1991

      5 노중국, "􋺷백제정치사􋺸", 일조각, 2018

      6 도수희, "􋺷백제어 연구􋺸", 제이앤씨, 2015

      7 金壽泰, "「熊津城의 變遷」", 􋺷百濟文化􋺸 30, 2001

      8 최경선, "「난원경 묘지명」", 주류성, 􋺷한국고대 문자자료연구 - 백제 (하) : 주 제별􋺸, 2015

      9 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10 都守熙, "「百濟의 言語資料」", 􋺷百濟硏究􋺸 제17집, 1986

      1 李弘稙, "「百濟人名考」", 􋺷서울大 人文大學論集􋺸 1輯, 1954

      2 안정준, "「李濟 墓誌銘」", 􋺷木簡과 文字􋺸 12, 2014

      3 이근우, "「역사서 편찬」", 􋺷백제의 문화와 생활􋺸, 2007

      4 千寬宇, "􋺷加耶史硏究􋺸", 일조각, 1991

      5 노중국, "􋺷백제정치사􋺸", 일조각, 2018

      6 도수희, "􋺷백제어 연구􋺸", 제이앤씨, 2015

      7 金壽泰, "「熊津城의 變遷」", 􋺷百濟文化􋺸 30, 2001

      8 최경선, "「난원경 묘지명」", 주류성, 􋺷한국고대 문자자료연구 - 백제 (하) : 주 제별􋺸, 2015

      9 노태돈,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1999

      10 都守熙, "「百濟의 言語資料」", 􋺷百濟硏究􋺸 제17집,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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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배재영, "「백제의 부여 인식」", 􋺷百濟文化􋺸 41, 2009

      15 李南奭, "􋺷百濟石室墳硏究􋺸", 학연문화사, 1995

      16 都守熙, "􋺷百濟語硏究􋺸 1∼4", 제이앤씨,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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