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백제의 국가성립과정에서 백제토기 신기종의 출현과 그 배경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한강유역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 미사리 유적 등이 조사되면서 한성기 백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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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 한신大學校 大學院, 2004
학위논문(석사)-- 한신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고고학전공 2004. 8
2004
한국어
911.033 판사항(4)
경기도
ⅳ, 84p. : 삽도 ; 26cm.
참고문헌: p. 8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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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백제의 국가성립과정에서 백제토기 신기종의 출현과 그 배경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한강유역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 미사리 유적 등이 조사되면서 한성기 백제토...
이 논문은 백제의 국가성립과정에서 백제토기 신기종의 출현과 그 배경에 대해 검토한 것이다. 한강유역의 몽촌토성, 풍납토성, 석촌동 고분군, 미사리 유적 등이 조사되면서 한성기 백제토기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백제토기 신기종의 출현과 배경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였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는 백제토기 신기종이 새로운 토기제작기술과 중국도자기의 모방으로 출현하게 되었고, 이는 백제 지배층의 정치적 의도로 제작되었음을 밝혔다.
백제토기 신기종은 백제의 국가성립과정에서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의 도입과 중국 도자기의 모방으로 출현하게 되었다. 서북한 지역에 위치한 낙랑군은 313년 멸망할 때 까지 원삼국~백제의 국가형성시기에 주요하게 영향을 끼쳐왔다.
토기 제작기술은 中國 郡縣 특히 낙랑의 토기제작기술의 영향인데, 원삼국 당시 3단계에 걸쳐 유입된다. 하나는 2세기 중반경으로 타날문토기의 출현이다. 원삼국 당시 중부지역은 小國으로 존재하여 정치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중국 군현과 교섭을 진행하여 성장하게 되었다. 중국 군현과의 교섭과정에서 중부지역의 소국은 군현의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어 군현의 주민이 유입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주민의 유입과 함께 낙랑토기제작 기술 중 녹로성형 기술, 낙랑(계)토기도 함께 유입되었다. 다른 하나는 3세기 중반경으로 낙랑토기 제작기술 중 깎기, 마연, 암문 등의 유입이다. 당시 중부지역의 소국과 중국 군현은 대립적이 긴장관계 속에서 3세기 중반경 대규모 전쟁으로 그 결과 伯濟國의 성장하게 되었다. 이 전쟁을 틈타 백제국은 낙랑의 변경민을 빼앗았다 돌려주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낙랑의 제도기술이 유입되었다. 마지막으로 313년과 314년 차례로 축출된 낙랑군과 대방군의 주민의 유입으로 전반적인 생산기술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중국 군현과의 교섭과정에서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이 유입되었던 것이다.
백제국은 3세기 중반경에 있었던 대규모의 전쟁으로 중국 군현 및 중국과 韓濊와의 중계무역을 독점하면서 고대국가의 틀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과정속에 수입되었던 선진문물은 위세품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백제의 국가 지배 방식의 하나로 변경지역의 수장층에게 賜與하여 지배력의 공고히 하였다. 한성기 백제의 변경지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의도로 수입된 도자기는 한정된 수량으로 정치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미흡하여, 백제 중앙 지배층의 의도로 중국 도자기를 모방한 토기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백제토기 신기종이다.
백제토기 신기종은 중국 도자기와 같은 위세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도자기와 함께 지방 수장층에게 사여되었다. 이처럼 백제토기 신기종은 백제 중앙의 국가 지배 방식의 일환으로 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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