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은 불교문화를 꽃피운 산이자 유교의 명산이기도 하다. 불교와 유교는 정반대의 이념이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구별하는 이념이다. 그런데 청량산은 어떻게 상반되는 두 이념을 함...
청량산은 불교문화를 꽃피운 산이자 유교의 명산이기도 하다. 불교와 유교는 정반대의 이념이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구별하는 이념이다. 그런데 청량산은 어떻게 상반되는 두 이념을 함께 획득하게 되었을까? 성리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조선이 숭유억불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불교는 점점 쇠퇴하게 되었고, 산 속의 절들 또한 쇠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교의 쇠락은 불교에서 유교로 이념이 교체되는 시기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청량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불교 쇠락 이후의 모습이다. 청량산은 불교의 쇠락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아예 유교의 성지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고는 이와 같이 불교문화를 꽃피운 산이 유교의 명산이 되어가는 과정, 즉 청량산이 脫佛敎化하여 儒敎化되어가는 과정을 청량산 유람록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청량산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의 무이산과 같이 유교의 聖山이 된 데에는 선인들의 단계적이고 의도적인 儒敎化 과정들이 있다. 가장 먼저, 周世鵬과 퇴계가 청량산을 불교적 이미지에서 탈피시키고자 노력하였다. 周世鵬은 「遊淸凉山錄」에서 청량산의 열 두 봉우리를 유교식으로 명명하고, 불교의 허황된 전승들을 비판함으로써 청량산의 불교적 이미지를 혁파하고자 하였고, 이후 퇴계가 周世鵬의 유람록에 「周景游遊淸凉山錄跋」을 남기며 周世鵬이 한 일들에 대해 극찬하여 청량산의 탈불교, 유교화를 지지하였다.
주자학을 흥기시키고자 하였던 周世鵬과 퇴계, 두 사람이 청량산을 불교적 이미지에서 탈피시키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후 주로 퇴계의 문인들이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周世鵬의 「遊淸凉山錄」의 유교식 명칭들을 그대로 인용하고, 반복하여 청량산의 봉우리들이 불교적 색채에서 탈피하여 유교적 이미지를 덧입게 되었다. 또한, 유람록 가운데 유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周世鵬과 퇴계, 두 사람을 항상 언급하여 청량산에 차츰 유교적 이미지를 덧입혀 의도적인 儒敎化를 꾀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퇴계 死後에 주로 퇴계의 문인들이 퇴계의 자취를 찾아 청량산을 유람하며, 청량산은 퇴계의 문인들이 퇴계를 기리는 장소가 되었다. 퇴계는 젊었을 때부터 청량산에서 독서하였고, ‘淸凉山人’이라 자호하며 청량산에 대한 애호를 드러내었다. 또, 청량산에 직접 손수 제명한 致遠庵이나 陶山書院 등의 유적이 있기 때문에 퇴계의 사후에 퇴계를 존경하던 자들이 청량산을 유람하며 퇴계의 자취를 계속하여 기리고 추모하는 장소로 삼게 된 것이다.
또한, 청량산은 퇴계의 문인들에 의해 단아하고 절의있는 선비의 이미지로 퇴계를 표상화하였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퇴계의 청량산을 주자의 무이산의 이미지와 결합시킴으로써 조선 유교의 聖山으로 표상화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