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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CI등재

      조선시대 兒名圖書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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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815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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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고는 조선시대 아명도서의 사급과정과 그 운영을 살피고, 나아가 조선후기에 한정하여 아명도서의 사급과 운영이 대일정책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아명도...

      본고는 조선시대 아명도서의 사급과정과 그 운영을 살피고, 나아가 조선후기에 한정하여 아명도서의 사급과 운영이 대일정책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조선시대 아명도서는 초기에는 쓰시마도주나 그 아들의 兒名으로 사급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쓰시마도주의 嫡子에게 사급되어 조선에 세견선을 파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조선시대 아명도서의 사급은 조선의 대일정책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선전기 조선은 통교를 원하는 왜인들의 도서사급이 급증하면서 세견선을 제한하고 접대규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무역 확대를 요구하는 왜인들의 변란이 잦아지면서 위기감을 느낀 조선은 쓰시마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쓰시마에 대해 세견선을 추가로 허락하고, 회수한 도서를 부활시키는 등 이전보다 완화된 태도로 전환하였다. 쓰시마도 조선의 東藩을 자처하며 왜구문제 해결에 협조하면서 아명도서와 그에 따른 세견선을 받는데 성공하였다.
      임란 이후 조일간의 국교가 재개되는데 앞장섰던 쓰시마는 그 공을 인정받아 도주의 도서와 함께 그 아들의 아명도서를 허락받았다. 조선후기에도 쓰시마는 아명도서의 운영에 있어서 도서를 반납하지 않고 사송선을 유지하거나 막부의 명을 들어 아명송사의 위상을 격상시키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무역량을 증대해 나갔다. 당시 조선은 청의 감시와 견제를 받으면서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남방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쓰시마의 계산을 알면서도 번번히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청의 지배질서가 안착되면서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확보하게 된 조선은 그동안 쓰시마의 잘못된 교섭관행을 바로잡고, 대일관계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시작하였다. 1683년 宗義眞의 아들 右京의 도서를 거절함으로써 이전의 아명도서 사급 사례를 特恩으로 인식시켜 전례 가능성을 차단하고, 아명도서 사급은 조선의 재량권이 크게 작용하는 사안임을 쓰시마에게 명확하게 인식시켰다. 또한 1709년 쓰시마가 彦千代의 도서를 요청했을 때에도 조선은 당시 외교현안이었던 교간사건의 처리문제와 연결하여 1711년 신묘약조가 체결될 때까지 조선의 주장을 관철하는데 유리한 협상카드로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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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is study, the endorsement process and management of the Amyong Doseowere investigated and relationship of these activities as a diplomatic strategy in the late Joseon Government was scrutinized. The Amyong Doseo was issued to the Tsushima Gove...

      In this study, the endorsement process and management of the Amyong Doseowere investigated and relationship of these activities as a diplomatic strategy in the late Joseon Government was scrutinized.
      The Amyong Doseo was issued to the Tsushima Governor or to the Tsushima Governor’s son under their Childhood name by Joseon Government.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he Amyong Doseo was issued to the Tsushima Governor’s son in order to endorse his right to deploy trading ships(Segyeon Shun). Issuing the Amyong Doseo was closely related to the diplomatic strategy of the Joseon Government toward Japan.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Joseon Government controlled trading ships and the privilege as there were increasing endorsement requests from Japanese for trade. As armed protests of Japanese increased because of the limited trading opportunities, the Joseon Government decided to alleviate the Japanese requests by cooperating with the Tsushima government. Based on this decision, the Joseon Government allowed more trading ships from Tsushima and re-issued endorsements that were retrieved. In accordance with these changes, Tsushima declared the island as a colleague of the Joseon Dynasty, helped Joseon protect itself Japanese Pirates, and was permitted the Amyong Doseo and trading ships.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sushima governor and his son were allowed the Amyong Doseo for their effort in recovering the diplomatic relationship between Joseon and Japan.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sushima did not return the Amyong Doseo and increased trade in various ways, including keeping private trading ships and promoting the Amyong Songsa based on the Tokugawa Bakufu. At that time, Joseon did not reject Tsushima’s request to secure the relationship with Japan because Joseon had a difficult relationship with the Qing Dynasty due to the surveillance and containment by that country. However, the Joseon Government led the relationship with Japan by correcting the diplomatic allowance to Tsushima when Joseon secured a diplomatic relationship with Qing Dynasty. In 1683, Joseon did not endorse Ukyong, who was a son of Jongeuijin. By this rejection, the Joseon Government showed Tsushima that the previous endorsement was an extraordinary case and endorsement was the unique right of Joseon Dynasty. Moreover, Joseon Dynasty rejected to endorse Unchundae, who belonged to Tsushima, in 1709 to utilize the endorsement right for taking advantage to complete the Shinmyo Agreement in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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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조선전기 아명도서의 賜給과 운영
      • 3. 조선후기 아명도서의 사급과 대일정책
      • 5. 맺음말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조선전기 아명도서의 賜給과 운영
      • 3. 조선후기 아명도서의 사급과 대일정책
      • 5.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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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松尾弘毅, "한일양국, 서로를 어떻게 기록했는가?" 경인문화사 2017

      2 윤유숙, "통신사・왜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3 홍성구, "청질서의 성립과 조청관계의 안정화: 1644∼1700" 동양사학회 (140) : 155-194, 2017

      4 "조선왕조실록"

      5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6 "邊例集要"

      7 "通信使謄錄"

      8 大場生與, "近世日朝關係における譯官使" 慶應義塾大學 1994

      9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10 米谷均, "近世前期日朝関係における「図書」の使用実態" 144 : 2001

      1 松尾弘毅, "한일양국, 서로를 어떻게 기록했는가?" 경인문화사 2017

      2 윤유숙, "통신사・왜관과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2005

      3 홍성구, "청질서의 성립과 조청관계의 안정화: 1644∼1700" 동양사학회 (140) : 155-194, 2017

      4 "조선왕조실록"

      5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6 "邊例集要"

      7 "通信使謄錄"

      8 大場生與, "近世日朝關係における譯官使" 慶應義塾大學 1994

      9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10 米谷均, "近世前期日朝関係における「図書」の使用実態" 144 : 2001

      11 "海行摠載"

      12 "東萊府接倭狀啓謄錄可考事目抄冊"

      13 "朝鮮送使國次之書契覺"

      14 韓文鍾, "朝鮮前期 對日外交政策 硏究 : 對馬島와의 關係를 중심으로" 全北大學校 大學院 1996

      15 "有懷堂集"

      16 中村榮孝, "日鮮關係史の硏究(上)" 1965

      17 "承政院日記"

      18 荒木和憲, "對馬宗氏の中世史" 吉川弘文館 2017

      19 田中健夫, "對外關係と文化交流" 思文閣出版 1982

      20 "宗氏家譜略"

      21 田代和生, "宗家旧藏‘圖書’と木印" 朝鮮學會 156 : 1995

      22 "增正交隣志"

      23 "同文彙考"

      24 "分類紀事大綱"

      25 "典客司日記"

      26 "典客司別謄錄"

      27 黑田省三, "兒名送使に就いて" 82 : 1955

      28 "備邊司謄錄"

      29 田中健夫, "中世海外交涉史の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59

      30 유채연, "『海行記』를 통해서 본 1734년 문위행" 한일관계사학회 (58) : 293-330, 2017

      31 長正統, "『朝鮮送使國次之書契覺』の史料的性格" 朝鮮學會 33 : 1964

      32 홍성덕, "17세기 조・일 외교사행 연구" 전북대학교 1998

      33 장순순, "17세기 조일관계와 ‘鬱陵島 爭界’" 부산경남사학회 (84) : 37-71,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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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 KCI등재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6-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5-05-30 학술지명변경 한글명 : 한일관계사학회 -> 한일관계사연구 KCI등재후보
      2005-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3-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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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지 인용정보

      학술지 인용정보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5 1.5 1.38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1.17 1.09 1.872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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