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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後漢時期 邊郡통치의 변화와 樂浪郡 = Change of Peripheral Commandery in the Later Han Dynasty and Nakrang Command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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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1702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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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글은 後漢 건국기 樂浪에서 발생한 王調 반란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작성되었다. 지금까지 연구들은 왕조반란의 원인으로 성장한 토착세력의 독립화 경향, 중국 본토의 반란집단과의 연...

      이 글은 後漢 건국기 樂浪에서 발생한 王調 반란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작성되었다. 지금까지 연구들은 왕조반란의 원인으로 성장한 토착세력의 독립화 경향, 중국 본토의 반란집단과의 연계 등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郡에 웅거하여 복종하지 않았다[據郡不服].”고 한 기사는 반란이 후한정부의 모종에 조치에 낙랑의 지배층이 복종하지 않으면서 일어난 것임을 알려준다. 글에서는 建武6년(30) 內郡과 國의 都尉官을 폐지한 光武帝의 조처가 왕조반란의 결정적 원인임을 논증해 보았다. 낙랑은 邊郡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설치시기부터 군사적 기능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낙랑은 군사적 기능 외에도 三韓과의 무역을 통해 무역거점으로 성장하였다. 그 과정 속에서 토착지배층이 성장하였고, 이들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권위를 높여갔다. 한편 낙랑이 번성기를 누리는 동안 중국에서는 新王朝의 失政과 재해로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편승하여 群雄들이 봉기하였다. 그 와중에 유력한 집단으로 부상한 것은 南陽의 劉秀였다. 그러나 중국 통일을 목전에 둔 광무제는 내군의 도위관을 폐지하는 조치를 내렸고, 변군에 군사적 역할을 집중시켰다. 무역거점으로 성장한 낙랑으로서는 변화된 군의 위상과 군의 지배층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조치라 여겼을 것이다. 왕조의 반란이 중국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이 아니었음은 새 태수가 파견된 후 나타난 반란 세력 사이의 분열을 통해 알 수 있다. 신임태수 王遵의 파견과 진압에 발맞춰 郡吏들이 반란 수뇌였던 왕조를 살해하고 항복하였다. 후한정부는 반란 진압 후 전격적으로 포상과 赦免을 실시한다. 그러나 前漢과는 다른 대외정책을 구사하던 후한은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빈번한 원주민의 반발에 직면하게 되는 변군에서 완전한 군현지배를 포기하며, 다수의 변군들을 방기하게 된다. 낙랑 東部都尉가 관할하던 嶺東 7縣역시 방기된 후 다시는 회복되지 못하게 된다. 후한 정부의 구심력이 약해지면서 낙랑의 번영기도 저물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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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study investigates the cause of Wang-diao’s rebellion occurred in Nakrang during the founding period of the Later Han. The studies to date have pointed out as the cause of the rebellion elements such as the tendency of independency in the growi...

      This study investigates the cause of Wang-diao’s rebellion occurred in Nakrang during the founding period of the Later Han. The studies to date have pointed out as the cause of the rebellion elements such as the tendency of independency in the growing indigenous population and the mainland China’s connection with the rebellious group in the region. However, an article which says, ‘they did not obey the commandery’, tells a story that the rebellion occurred by the disobedience to certain actions of the Later Han government. This study ascertains to prove that the repeal of 30 years’ inner commandery and the abolition of defender position of the country as the cause of the rebellion.
      Nakrang was a peripheral commandery and because of that distinctiveness, its military function was highlighted from the installation period. However, in addition to its military capabilities, Nanglang grew as a trading base through the trade with Sam-han. The indigenous ruling class had grown in the process and they increased their authority by accepting the civilization of China. Meanwhile, while Nakrang was enjoying its prosperity, there was a peasant revolt following the maladministration of the new dynasty and a series of disasters in China, and many rival leaders jumped on the bandwagon and rose in rebellion. One of the potent groups was Liu-xiu of Nanyang. However, the Kuang-wu Emperor who had the vision of reunification of China in sight ordered the abolishment of defender position in the inner commanderies, and focused on the military role in the peripheral commanderies. For Nakrang, which had grown to be a trading stronghold, the order could have been considered as an action that totally ignored its military position and its ruling military class.
      The revolt of Nakrang was not a complete departure from China and that was proved after a new governor was dispatched as there was a division among the rebels. In line with the dispatch of the new viceroy Wang-zun and the suppression, the defenders killed Wang-jo who was the leader of the revolt and surrendered. The Later Han government quickly conducted reward and amnesty policy after suppressing the uprising. However, it cost them a lot of money and had to abandon many peripheral military forces that faced frequent opposition from indigenous peoples. As the centripetal force of the Later Han government became weaker, the prosperity of Nakrang also began to decre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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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王調 반란에 대한 의문점
      • 3. 王調 반란 前夜의 樂浪郡
      • 4. 後漢의 邊郡 통치와 樂浪郡의 선택
      • 국문초록
      • 1. 머리말
      • 2. 王調 반란에 대한 의문점
      • 3. 王調 반란 前夜의 樂浪郡
      • 4. 後漢의 邊郡 통치와 樂浪郡의 선택
      • 5. 맺음말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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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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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권오중, "樂浪郡硏究" 一潮閣 1992

      6 趙紅梅, "樂浪郡太守考" 31 (3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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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高久健二, "樂浪古墳文化硏究" 학연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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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李賢惠, "李基白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上)" 一潮閣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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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권오중, "樂浪郡硏究" 一潮閣 1992

      6 趙紅梅, "樂浪郡太守考" 31 (31): 2010

      7 高久健二, "樂浪郡と三韓の交易システムの形成" 6 : 2012

      8 高久健二, "樂浪古墳文化硏究" 학연문화사 1995

      9 李庚美, "樂浪古墳出土漆器에 대한 一考察" 11 : 1992

      10 尹龍九, "樂浪前期郡縣支配勢力의 種族系統과 性格-土壙木槨墓의 분석을중심으로" 126 :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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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2-06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The Society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9-2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Journal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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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28 1.28 1.1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89 2.254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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