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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간섭기 국정운영과 都評議使司 = Government Operation during Yuan’s Intervention and Dopyeongeuisasa(都評議使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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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3807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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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논문은 원간섭기 지배체제가 구축되는 충렬왕과 충선왕대를 중심으로 親朝·在元 통치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도평의사사의 역할을 살핀 것이다. 林衍 정권이 무너...

      이 논문은 원간섭기 지배체제가 구축되는 충렬왕과 충선왕대를 중심으로 親朝·在元 통치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가 등장하는 과정에서 도평의사사의 역할을 살핀 것이다.
      林衍 정권이 무너지고 왕정이 복고된 이후 원과의 관계 및 삼별초 난에 대한 처리 문제 등으로 재추 회의가 도병마사에서 자주 개최되면서, 고려전기에 별도로 존재하였던 재추 회의와 도병마사는 하나의 기구, 즉 도병마사로 통합되었다.
      원의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국왕의 친조라는 새로운 정치 형태가 대두하였다. 국왕의 친조 및 부재 시 국왕을 대신해 국정 운영을 책임져 줄 수 있는 존재는 재상이었다. 그런데 충렬왕 즉위 이후, 원은 고려 재상에 대한 문제점을 여러 차례 제기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국정 운영을 주도하는 재상이 없다는 이유로, 비칙치를 별도로 설치하여 국왕 측근을 중심으로 하는 국정 운영을 시도하였다. 한편 원도 衣冠子弟들을 독로화로 삼아, 직접 고려의 재상을 견제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이로 인해 국정 운영에서 재추들의 활동은 위축되면서 정사를 논의하는데 주도하는 재상이 없다는 상황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에 충렬왕은 도병마사를 도평의사사로 개칭하면서 도평의사사를 국정 전반의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논의하는 상설기구로 변화시켰다. 또한 국왕의 요청에 의해서만 개최되었던 회의를 국왕의 요청이 없어도 재추가 판단하여 회의를 개최하도록 하는 등 재추들이 전폭적으로 협조하고 적극적으로 국정 운영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한편 재원통치를 실시하였던 충선왕대에는 국정 운영 및 대원 외교에서 중요한 사안은 충선왕이 직접 傳旨를 보내 처리하였지만, 그 외의 사안은 도평의사사가 처리하였다. 그런데 재원통치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많은 관료들의 도움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관계로, 충선왕은 재추만이 아니라 3품 관료들에게 商議 및 權授 관직을 하사하여 거대한 재추 집단을 형성시켰다. 그 결과 도평의사사는 정책 결정만이 아니라 행정 운영까지도 총괄하는 등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세세한 부분까지 관할하게 되었으며, 여러 정치세력 간의 이해관계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런데 도평의사사에 참석한 인원이 급격하게 증원되고 세세한 문제까지 논의됨에 따라, 회의 과정에서 재추들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개입되거나 재추들끼리 대립하여 의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이에 재원통치가 본격화되는 충선왕 2년을 기점으로, 충선왕은 국정 문제를 논의하는 기구의 명칭을 도평의사사에서 식목도감으로 바꾸었다. 또한 재추만 식목도감 회의에 참석하게 하였다. 그리고 식목도감의 업무를 ‘掌邦國重事’로 명시하여 식목도감이 국정 문제와는 거리가 멀거나 사소한 문제까지 관여하는 것을 제한하였다.
      이후 식목도감은 충숙왕대에 도평의사사로 명칭이 환원되었다. 그런데 충선왕 이후 도평의사사는 어린 국왕이 즉위하거나 국왕이 원에 압송되어 장기간 체류하고 있을 때 –국왕의 명령 없이도- 국정 전반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고 총괄하기까지 하였다. 이렇듯 원간섭기 도평의사사는 회의기구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적 상황에 따라 때로는 행정 관청을 관할하거나 국왕을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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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role of Dopyeongeuisasa in the transient days when the Yuan(元)’s intervention to Goryeo was fully established during the reigns of King Chungyeol and King Chungseon and a new political system named Chinjo/Jaewon(親�...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role of Dopyeongeuisasa in the transient days when the Yuan(元)’s intervention to Goryeo was fully established during the reigns of King Chungyeol and King Chungseon and a new political system named Chinjo/Jaewon(親朝·在元) appeared first.
      After Imyeon(林衍)’s government was collapsed and the kingship was restored, Jaechu(high ministers) Meeting was frequently held in Dobyeongmasa to deal with the relation with Yuan and the revolt of Sambyeolcho. In this process, Jaechu Meeting and Dobyeongmasa which had existed independently in the early days of Goryeo came to be united into one as Dobyeongmasa. When the two organizations were united, the key role was held by Jaechu Meeting. Therefore, when there were some changes in chief ministers, the integrated Dobyeongmasa had also suffered the changes.
      As Yuan’s intervention got into stride, a new type of politics named king’s Chinjo (courtesy visit) to China began in Goryeo. While a king was out of country for Chinjo, the one who should take up the ruling power in stead of him was Jaesang (prime minister). But, since the enthronement of King Chungyeol, Yuan pointed out the problem of Goryeo Jaesang several times. So, presenting the apparent reason that there were no Jaesangs who could lead the national administration, King Chungyeol newly installed Bichigseo(必闍赤), leaving his close aides to take up the administration. Meanwhile, Yuan took the sons of high ministers[衣冠子弟] as hostages to control Goryeo ministers directly.
      In this situation, the activities of Jaechu got weaker and weaker, worsening the vacancy of leading prime minister. So, King Chungyeol changed the title of Dobyeongmasa into Dopyeongeuisasa and made it a permanent organization to deal with overall administrative problems. Unlike the former meeting that had been held only by the request of king, it could be held by the decision of Jaechu without king’s request. Thus, Jaechu came to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administration actively, fully cooperating with kings.
      In case of King Chungseon who ruled Goryeo while staying in Yuan, some important issues about administration and diplomacy to Yuan were ordered by him directly with the message, but other problems were left to Dopyeongeuisasa. Furthermore, as he absolutely needed the support and cooperation of many ministers for the success of his remote ruling in Yuan, King Chungseon granted the positions of Sangeui(商議) and Gwonsu(權授) to third-grade vassals as well as Jaechu ministers, forming a huge Jaechu group. With this, Dopyeongeuisasa came to govern not only the decision of important policies but also all the national administration to the detail parts, adjusting the conflicting interests among diverse political power groups.
      By the way, as the members of Dopyeongeuisasa increased rapidly and every detailed problem came to be discussed by them, the personal interests of Jaechu ministers began to collide with each other in the meeting, making it difficult to adjust their opinions. So, in the second year of his reign when King Chungeon’s full-scaled ruling from Yuan started, he changed the tile of the supreme organization from Dopyeongeuisasa to Sigmogdogam(式目都監) and made only Jaechu ministers participated in Sigmogdogam. And he restricted the issues that could be discussed in Sigmogdogam as ‘the important national problems(掌邦國重事)’ to prevent Sigmogdogam from dealing with trivial and minute administrative things.
      Later, during the reign of King Chungsug, Sigmogdogam was named back to Dopyeongeuisasa. Anyhow, since King Chungseon, Dopyeongeuisasa discussed the overall administrative problems and governed the country – without the order of kings – while a young king was in the throne or a king was out of the country for a long time, staying in custody in Yuan. In this way, Dopyeongeuisasa took a role not only as a consulting meeting but also as an actual governing 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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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이정훈, "원간섭기 첨의부의 위상과 역할 –충렬왕과 충선왕대를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88) : 209-241, 2013

      2 이정훈, "원간섭기 商議 관직의 설치와 변화" 한국사연구회 (163) : 113-142, 2013

      3 "역옹패설"

      4 "문종실록"

      5 "목은시고"

      6 "고려사절요"

      7 "고려사"

      8 "가정집"

      9 邊太燮, "高麗의 式目都監" 15 : 1973

      10 邊太燮, "高麗都堂考" (11·12) : 1969

      1 이정훈, "원간섭기 첨의부의 위상과 역할 –충렬왕과 충선왕대를 중심으로–" 한국역사연구회 (88) : 209-241, 2013

      2 이정훈, "원간섭기 商議 관직의 설치와 변화" 한국사연구회 (163) : 113-142, 2013

      3 "역옹패설"

      4 "문종실록"

      5 "목은시고"

      6 "고려사절요"

      7 "고려사"

      8 "가정집"

      9 邊太燮, "高麗의 式目都監" 15 : 1973

      10 邊太燮, "高麗都堂考" (11·12) : 1969

      11 金甲童, "高麗時代의 都兵馬使" 141 : 1994

      12 金昌賢, "高麗後期 都評議使司 體制의 성립과 발전" 54 : 1997

      13 金光哲, "高麗後期 都評議使司 硏究" 5 : 1998

      14 金龍善, "高麗墓誌銘集成" 翰林大學校 出版部 2006

      15 金惠苑,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5

      16 李益柱, "高麗·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大學校 大學院 1996

      17 金光哲, "高麗 忠烈王代 政治勢力의 動向" 7 (7): 1985

      18 노명호, "韓國古中世古文書硏究 (상)"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19 金塘澤, "都堂을 통해 본 高麗 禑王代의 정치적 상황" 역사학회 180 : 35-62, 2003

      20 末宋保和, "朝鮮議政府考" 9 : 1956

      21 이정훈, "忠宣王代 官制 改革과 관청간의 統屬관계" 한국중세사학회 (32) : 143-181, 2012

      22 이강한, "1308~1310년 고려내 “牧・府 신설”의 내용과 의미 -충선왕대 지방제도[계수관제] 개편방향에 대한 검토-" 한국사연구회 (158) : 67-11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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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2-06 학회명변경 영문명 : 미등록 -> The Society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5-09-29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미등록 -> The Journal for the Studies of Korean History KCI등재
      2004-01-01 평가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평가 등재후보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평가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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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28 1.28 1.1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89 2.254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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