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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만조선의 멸망과 1세기 이전 낙랑 지역에 대한 여러 인식 = The Various Awareness for the Fall of Wiman Joseon and Nakrang Area before the 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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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awareness for the fall of Wiman Joseon and Nakrang area of Han people(=chinese) and natives is diverse. Han people thought that they submitted the entire area of Wiman Joseon, but they tried not to change the existing system to minimize the reacti...

      The awareness for the fall of Wiman Joseon and Nakrang area of Han people(=chinese) and natives is diverse. Han people thought that they submitted the entire area of Wiman Joseon, but they tried not to change the existing system to minimize the reaction of natives. Several forces under control of Wiman Joseon regarded the fall of Wiman Joseon as the annihilation of forces that prevented direct trade with Han state. The fall of Wiman Joseon was not the end of Old Joseon society. There were, of course, the forces that opposed Han's rule. Han regarded Nakrang area as regions in which governments were installed but also as outside of china. At the same time, they perceived Nakrang as an area where the edification took place. However, they recognized that the people of Nakrang area was not edified by Han but had already been edified at Old Joseon period. The people who lived in the ruling base of Lelang County had some sense of self-awareness as a Han people. However, there were countries with independent kingship like Nakrang state in Nakrang area. Han state saw the inhabitants of eastern Dandandaelyeong as Ye tribes. Prior to the 1st century, the forces around Nakrang did not fully realize that Nakrang area was a part of Han state. Gogulyeo and Silla recognized Nakrang area society centered on indigenous people, Baekje limitedly recognized administrative scope of Lelang County. Silla recognized Nakrang area through Lelang County not Nakrang state. This was because the destruction of Wiman Joseon did not mean that Old Joseon had completely disappe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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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한과 토착 세력의 위만조선의 멸망과 낙랑 지역에 대해 인식은 다양하였다. 한은 위만조선의 영향력이 끼친 전 지역을 복속한 것으로 여겼지만 토착 세력의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기존 체제...

      한과 토착 세력의 위만조선의 멸망과 낙랑 지역에 대해 인식은 다양하였다. 한은 위만조선의 영향력이 끼친 전 지역을 복속한 것으로 여겼지만 토착 세력의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기존 체제에 변화를 주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위만조선의 통제를 받던 여러 토착 세력은 위만조선의 멸망을 한과의 직접 교역을 방해하는 세력의 소멸로 인식하였을 따름이다. 위만조선의 멸망이 고조선 사회의 소멸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한의 통치에 반발한 세력도 있었다. 한은 낙랑을 군현을 설치한 지역으로 인식하면서도 중국과 구별되는 지역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면서도 낙랑을 교화가 이루어진 지역으로 인식하였다. 다만 한에 의해 교화된 것이 아니라 고조선 시기에 이미 교화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았다. 낙랑군 통치의 중심 지역에 있던 자들은 어느 정도 漢人 의식을 지녔다. 그러나 낙랑 지역에는 낙랑국처럼 독립된 왕권을 지닌 세력도 있었다. 또한 한은 단단대령 동쪽의 세력을 예족으로 구분해서 보았다. 1세기 이전 낙랑 주변 세력들은 낙랑 지역이 한의 군현이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고구려와 신라는 토착 세력들을 중심으로 낙랑 일대 사회를 인식하였고, 백제는 낙랑군의 관할 지역을 제한적으로 인식하였다. 신라는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을 통해 낙랑을 인식하였다. 이것은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고조선 사회가 완전히 해체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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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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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운용, "樂浪關聯墓誌銘에 보이는 箕子繼承意識" 고려사학회 (65) : 133-164, 2016

      2 李庚美, "樂浪古墳出土漆器에 대한 一考察" 11 :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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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01 평가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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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16 1.28 1.28 1.11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97 0.89 2.254 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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