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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明의 철령위와 고려말 국경의 재검토 = Ming Dynasty’s Cheollyeongwi and the border at the end of the Koryo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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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9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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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t was known that the Ming Dynasty attempted to rule directly Cheollyeong of the Gangwon Province and further north, SSangsung-Chongganbu area at the end of the Koryo era. By the way, in December of 1387, the Joo, Wonjang, founder of the Ming Dynasty,...

      It was known that the Ming Dynasty attempted to rule directly Cheollyeong of the Gangwon Province and further north, SSangsung-Chongganbu area at the end of the Koryo era. By the way, in December of 1387, the Joo, Wonjang, founder of the Ming Dynasty, had informed that the Ming and Koryo Dynasty should be bounded by the Cheollyeong. The Cheollyeong was not in the northern end of Gangwon Province but in Liaodong area.
      This can be known from the Ming's answer to Koryo's claim that the land in the northern part of Cheollyeong is Koryo’s Land. The Ming regarded thoroughly that the Cheollyeong, which Koryo says, was not in Gangwon Province but in Liaodong area. And, notified that from the old days, the Abrok River was the border of Koryo, and the Cheollyeongwi had already been established in Liaodong area.
      This means that the Joo, Wonjang, founder of the Ming Dynasty had originally intended to set up the Cheollyeongwi not on the north side of Gangwon Province but on the Liaodong area. It also means that Ming had no intention to govern SSangsung-Chongganbu area at that time, further north of Cheollyeong of nowadays Gangwon Province.
      By the way although Joo, Wonjang ordered to inform the facts on the above-mentioned to Koryo, in Koryo History, not only the facts that "the Cheollyeongwi was already established in Liaodong" are omitted, but also the facts are recorded in a distorted way saying that "Ming has ceased discussions on the establishment of the Cheollyeongwi.
      The link between these historical facts led to the conclusion that in 1388, the border between Ming and Koryo Dynasty was the Cheollyeongwi of Liaodong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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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고려말 1387년 12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명나라와 고려간에 철령을 경계로 할 것을 통고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철령은 강원도 북단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었다. 이는 고려가 ‘...

      고려말 1387년 12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명나라와 고려간에 철령을 경계로 할 것을 통고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철령은 강원도 북단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철령이었다.
      이는 고려가 ‘철령과 그 이북의 문주, 함주, 공험진 등이 고려땅’임을 주장한 표문을 명나라에 제출한데 대해, 명 태조가 ‘요동의 봉집현에 이미 철령위가 설치(1388년 3월)되었고, 고려는 옛날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해왔으므로, (요동의) 철령과 그 이북땅은 명나라땅’임을 주장하여 거부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즉, 고려가 그 철령이 ‘강원도 철령’인지 ‘요동의 철령’인지 명시하지 않고, 고려땅임을 주장한데 대해, 명나라는 철두철미하게 요동에 있는 철령에 관한 것으로 간주하고 고려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애당초부터 주원장이 강원도 북단 철령이 아닌 요동의 철령을 경계로 하여, 그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자 했고, 당연히 강원도 철령 이북의 쌍성총관부 지역을 직접 통치할 생각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위의 철령위에 관한 사실들을 고려에 통고하도록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요동에 이미 철령위가 설치되었다(1388년 3월)는 사실’이 누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에서 철령위 설치 논의가 중지되었다”고 왜곡되게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누락 왜곡이 오늘날 교과서에까지 왜곡되게 기록된 원인의 시작이다. 그 후 대일항쟁기에 일제 학자들에 의해 '고려말 문제가 된 철령은 강원도 철령'을 말하는 것으로 고착되고, 해방 이후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그대로 답습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위의 역사적 사실을 연계시키면, 고려말 1388년 당시 명나라와 고려간 국경은 요동땅 철령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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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姜尙雲, "麗明(韓中) 國際關係硏究: 元明交替期에서 鐵嶺 立衛까지" 235-267, 1959

      2 이병도, "한국사대관" 보문각 1964

      3 복기대,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검토" 국학연구원 9 : 297-325, 2010

      4 정재정, "중학교 역사 1" 지학사 2018

      5 李花子, "고려·明 간의 철령위 설치를 둘러싼 논쟁의 진실" 한민족대외관계사연구소 3 : 7-24, 2009

      6 김순자, "고려~조선초 한 ` 중간 영토에 대한 현대 중국학계의 시각" 한국역사연구회 (76) : 279-323, 2010

      7 末松保和, "麗末·鮮初に於ける對明關係" 1 : 361-374, 1941

      8 池內宏, "高麗辛禑朝に於ける鐵嶺問題" 東洋協會調査部 8 : 96-113, 1918

      9 津田左右吉, "高麗末に於ける鴨綠江畔の領土" 南滿洲鐵道株式會社 2 : 242-244, 1913

      10 박원호, "鐵嶺衛의 위치에 관한 재고" 동북아역사재단 13 : 107-137,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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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복기대, "철령위 위치에 대한 재검토" 국학연구원 9 : 297-325, 2010

      4 정재정, "중학교 역사 1" 지학사 2018

      5 李花子, "고려·明 간의 철령위 설치를 둘러싼 논쟁의 진실" 한민족대외관계사연구소 3 : 7-24,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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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津田左右吉, "高麗末に於ける鴨綠江畔の領土" 南滿洲鐵道株式會社 2 : 242-244, 1913

      10 박원호, "鐵嶺衛의 위치에 관한 재고" 동북아역사재단 13 : 107-137, 2006

      11 稻葉岩吉, "鐵嶺衛の位置を疑ふ" 靑丘學會 18 : 120-122, 1934

      12 박원호, "鐵嶺衛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한국사연구회 (136) : 105-132, 2007

      13 和田淸, "明初の滿洲經略上篇" 東京帝國大學文學部 14 : 177-298, 1934

      14 李基白, "國史新論" 第一出版社 1963

      15 남의현, "元・明交替期 한반도 북방경계인식의 변화와 성격 -明의 遼東衛所와 3衛(東寧・三萬・鐵嶺)를 중심으로-" 한일관계사학회 (39) : 37-74, 2011

      16 이인철, "『철령위』위치에 대한 재고찰" 지식산업사 (4) : 95-126, 2015

      17 조선사편수회, "『조선사』 제3편 제7권" 조선총독부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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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39 0.39 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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