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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후기 必闍赤의 설치와 그 변화 = Installation of Bitikchi(必闍赤) in Late Goryeo and its Ch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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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A105975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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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why Bitikchi, which was originally a Yuan’s system, was introduced into Goryeo and how it changed. Due to the war against Mongolia, the military government of Goryeo was collapsed and the monarchy was restored...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why Bitikchi, which was originally a Yuan’s system, was introduced into Goryeo and how it changed. Due to the war against Mongolia, the military government of Goryeo was collapsed and the monarchy was restored. As the king 's authority fell down and the state administration was deteriorated during the military ruling, it was difficult for the king to take the initiative in the government even after the restoration of kingship. This weakening of kingship was not matched with the Yuan’s policy to rule Goryeo through the king. Yuan’s emperor Sejo tried to strengthen the political position of King Chungryeol by solving the problem King Chungryeol had asked while pushing him to take the leadership in the state administration. King Chungryeol introduced the Bitikchi which is known as the royal guard system(kesig, 怯薛) of Yuan’s emperor, and tried to recover his strong sovereignty.
      During the reign of King Chungryeol, the Bitikchi discussed the problems of each department with the king to make decision about them and proposed diverse policies for the national administration. In addition, the Bitikchi handled the secret tasks in the palace along with the Sinmunsaek in charge of the royal communications. As the Bitikchi and the Sinmunsaek worked together for royal tasks, the administrative discussion, decision and communication on the state could be treated rapidly and the king’s intention could also be well reflected to the state administration. Through this, King Chungryeol was able to acquire the administrative initiative in his country.
      The Bitikchi was abolished in the 1st year of King Chungseon but reestablished along with the inauguration of King Chungjeong. After the re-installation, the Bitikchi was used as a sub-office belonging to the royal bureaucrat such as Wangbu Bitikchi or Jeongbang Bitikchi. In other words, the Bitikchi was once the center for the royal administr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Chungryeol but became a specific administrative post snice King Chungjeong.
      In particular, the re-established Bitikchi was often used as a sub-office of the Personnel Administrative Ministry, or the officer assigned to Bitikchi served the personnel works. As a result, the Bitikchi came to be recognized as an officer in charge of personnel management. Therefore, compiling the Goryeo history, the early Joseon historians recorded the Bitikchi as a bureaucrat in the administrative off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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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본 연구는 원의 제도였던 비칙치가 고려에 도입된 이유와 목적, 그 변화상을 고찰한 것이다.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무신집권기에 무신이 국정...

      본 연구는 원의 제도였던 비칙치가 고려에 도입된 이유와 목적, 그 변화상을 고찰한 것이다.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무신정권이 붕괴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무신집권기에 무신이 국정운영을 주도한 결과 국왕의 권위가 하락하고 국정운영 방식도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왕정복고 후 국왕이 곧바로 주도권을 갖고 국정을 운영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국왕권의 약화는 국왕을 매개로 고려를 지배하려던 원의 지배정책과 배치되었다. 이에 원 세조는 충렬왕의 요청을 들어줌으로써 충렬왕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한편 충렬왕에게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원 세조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었던 충렬왕은 원 황제의 겁설로 널리 알려진 비칙치를 도입하여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을 시도하였다.
      모든 관청이 국왕에게 보고하고 국왕이 모든 관청에 직접 명령을 하달하는 행정 및 국정운영 체제 위에서, 비칙치는 각 관청에서 보고하는 문제를 국왕과 함께 논의․결정하였으며, 국정운영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였다. 또한 비칙치는 왕명출납을 담당한 신문색과 함께 궁궐에서 기무를 처리하였다. 그 결과 정책에 대한 논의 및 결정, 왕명출납이 한 자리에서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궁궐에서 이런 일들이 처리됨에 따라 충렬왕의 의도가 국정운영에 잘 반영될 수 있었다.
      비칙치는 충선왕 즉위년 관제 개혁으로 폐지되었다가 충정왕 즉위를 전후하여 다시 설치되었다. 재설치 후 비칙치는 왕부 비칙치, 정방 비칙치 등 궁궐에 위치한 관청에 배속된 하위 관직으로 활용되었다. 즉 충렬왕대에는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을 담당하는 기구였다가 충정왕대부터는 관청에 속한 특정 관직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재설치된 비칙치는 인사 담당 관청의 하위직으로 배속되거나 비칙치에 임명된 관료가 인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비칙치를 인사 담당 관료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조선초기 사대부들이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비칙치를 정방에 속한 문사들로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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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金潤坤, "麗末鮮初의 尙瑞司" 25 : 1964

      2 이익주, "충선왕 즉위년(1298) 개혁정치의 성격-관제(官制) 개편을 중심으로" 7 : 1992

      3 이정훈, "고려후기 提調類관직의 도입과 의미" 한국사학회 (127) : 313-348, 2017

      4 林亨洙, "고려후기 怯薛制 운영 연구" 고려대 2017

      5 김보광, "고려 충렬왕의 케시크제 도입과 그 의도" 한국사학회 (107) : 125-16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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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朴龍雲, "高麗時代中樞院硏究"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2001

      9 金昌賢, "高麗後期 政房 硏究" 고려대 民族文化硏究所 1996

      10 金光哲, "高麗後期 世族層 硏究" 東亞大出版部 1991

      1 金潤坤, "麗末鮮初의 尙瑞司" 25 :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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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金光哲, "高麗後期 世族層 硏究" 東亞大出版部 1991

      11 "高麗史節要"

      12 "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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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李貞薰, "高麗前期 三省制와 政事堂" 104 : 1999

      15 李益柱, "高麗·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서울大學校 大學院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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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朴宰佑, "高麗 忠宣王代 政治運營과 政治勢力 動向" 29 : 1993

      18 金甫桄, "高麗 內侍 硏究" 고려대 2011

      19 金成俊, "韓國中世政治法制史硏究" 一潮閣 1985

      20 "牧隱集"

      21 金庠基, "東方文化交流史論攷" 乙酉文化社 1948

      22 "朝鮮王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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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박용운, "「高麗史」 百官志의 特性과 譯註" 3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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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 1.05 2.153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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