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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두산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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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소두산신도비는 봉동읍 둔산리 870 완주공단 끝부분에 있다. 당초에는 나지막한 야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하여 아파트 숲속에 갇히는 형상이 되었다. 방형대석에 정사각형의 ...

      소두산신도비는 봉동읍 둔산리 870 완주공단 끝부분에 있다.
      당초에는 나지막한 야산에 있었으나 지금은 도시개발로 인하여 아파트 숲속에 갇히는 형상이 되었다. 방형대석에 정사각형의 비신을 세우고 사각형의 옥개형 개석을 올렸다. 사각형의 비신도 독특하지만 한 면의 높이가 218cm고, 폭이 77cm에 이르는 보기 힘
      든 거대한 비이다. 비신이 사각형이라 옥개석 역시 사각인데 옥개석의 중앙부를 마치 탑의 상륜부와 같이 복발형으로 조각하였다.
      비문은 3600여 자의 장문으로 덕은 송환기가 짓고 10세손 소상영이 두전을 쓰고 월성 이정수가 해서로 썼다. 비문을 지은 연대는 1800년인데 건립한 연대는 1912년이다.3600자의 장문을 새길만한 큰 비를 세우기란 예나 지금이나 쉽지 않았나 보다.
      소두산의 본관은 진주이며 자를 망여라 하고 호를 월주라 했다. 일찍이 우암과 동춘당 양 문하에 들어가 춘추대의를 들었고 두 선생은 소두산을 무척 아끼고 칭찬하였다. 26세에 진사가 되었고 34세에 성균관 시험에 장원하였고, 전시에도 장원하여 성균관 전적
      이 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좌랑이 되었고 1661 년에는 삼도 해운관에 겸직되어 조운한 쌀에서 나머지를 취하여 관부에 들여 놓는 게 준례인데 소두산은 모두 조졸에게 나누어 주고 조금도 사사롭게 처분한 적이 없었다.
      사간원 정언을 거쳐 해운판관으로 있다가 전주 안주 판관으로 옮겨졌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대간으로 일하다가 어버이 봉양할 곳을 구하여 서천군수가 되고 나주목사로 승급되었다. 이 때 정승 허적이 정권을 잡으면서 우암 송시열이 죄를 얻어 해상에 안치되자 그 또한 사헌부에서 계사하여 지급을 삭제하고 다른 일로 얽어 관헌영부에서 삭제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동춘당과 우암의 인맥에 있던 그는 숱한 당쟁의 회오리 속에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더욱 더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한 많은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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