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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호군 이진이 상소한 전라도 신 관영의 지리적 ․ 군사적 단점에 대한 개선 방안.
대호군 이진(李秦)이 상서하기를,
“신 진이 근일에 명령을 받잡고 강진(康津) 땅에 가서 읍성을 쌓을 만한 곳을 보다가, 그 길에 전라도의 원수부(元帥府)가 전날의 도강현(道康縣)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조정에서 연해변을 위하여 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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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신이 왜구를 막을 병선을 제조할 것을 상소하다.
병조 참의 박안신(朴安臣)이 상서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도리는 오직 마땅히 지난 일을 거울삼아 뒷일을 염려하여, 그 장구히 다스려지고 오래 편안하기를 도모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이고 왜도(倭島)와 심히 가까와서, 예전 삼국시대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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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 시험시 육량에 대해 ≪대전≫ 대로 하게 하다.
주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이환(李芄) 이 아뢰기를,
“이 대문에 ‘왜선 500척이 진포(鎭浦) 어구에 들어왔다.’ 했는데 전조(前朝) 때에 적임자가 될 만한 장수를 얻지 못하고 병비를 또한 조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왜적이 내지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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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 500척이 진포에 침입하자 태조가 왜장 아기발도를 죽이다.
신우(辛禑) 6년(1380) 경신 8월, 왜적의 배 500 척이 진포(鎭浦)에 배를 매어 두고 하삼도(下三道)에 들어와 침구하여 연해의 주군(州郡)을 도륙하고 불살라서 거의 다 없어지고, 인민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시체가 산과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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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이 교지를 내려 왜노를 막은 태조의 공을 치하하다.
창왕이 교지를 내리니,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이성계(李成桂)는 문무의 계략과 장상의 재간으로서 들어와서는 삼공(三公)도적질 한 계책여불위(呂不韋)가 잉태한 자기의 첩을 진왕(秦王)에게 바쳐, 시황제(始皇帝)를 낳게 하였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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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퇴치를 위해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이 졸하다.
검교 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최무선(崔茂宣)이 졸하였다. 무선의 본관은 영주(永州)요, 광흥창사(廣興倉使) 최동순(崔東洵)의 아들이다.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 부사에 이르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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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실이 왜를 막은 공으로 그의 아버지 박자안을 죽음에서 구하다.
순군천호(巡軍千戶) 한을기(韓乙氣)를 보내어 박자안(朴子安)을 군중에서 베이게 하였는데, 그때에 자안이 왜적을 쫓아 바야흐로 전라도 진포(鎭浦)에 이르렀다. 일이 저 적에 관계되므로 비밀히 하고 선포하지 않으니, 바깥 사람들이 알수 없었다. 그 아들 박실(朴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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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와국의 진언상 등이 돌아가니 물품을 하사하다.
조와국(爪蛙國)의 진언상(陳彦祥) 등이 돌아가니, 임금이 후하게 하사하여 보냈다. 진언상이 의정부에 글을 올려 말하였다.
“영락(永樂) 4년 5월 18일에 국왕이 〈저희들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가지고 특별히 조선국에 가서 진하하라.’하기에, 그해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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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좌우변을 좌우령으로 나누어 방어케 하다.
경기도 관찰사가 좌우도수군절제사(左右道水軍節制使) 정문에 의거하여 좌우변(左右邊)에 속해 있는 전 만호(萬戶) 김세보(金世甫) 등의 호소를 보고하기를,
“우리들은 본시 전라도 바닷가 여러 고을에 있었사온데, 경인년 이후로 왜적이 일어나기 시작하매 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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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 최영(崔瑩)은 풍채가 헌걸차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 났다. 처음에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의 휘하에 있으면서 누차 왜적을 사로잡아 용맹을 떨쳤으므로 달적(達赤)으로 채용되었다. …… 공민왕 6년에 외직으로 나가서 서해(西海), 평양(平壤), 이성(泥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