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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 주문사 공조참판 정분을 보내어 왜구의 침략행위에 대해 알리다.
주문사(奏聞使) 공조참판 정분(鄭苯)을 보내어 북경에 갔다. 그 주본에 말하기를,
“공경히 배신 이주판관(義州判官) 홍유강(洪有江)이, 요동천호(遼東千戶) 혁연(赫連)이 받들고 온 칙유(勅諭)를 전해 받아 가지고 온 것을 받잡고, 신이 감격함을 이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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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평양의 전세를 감면하고 활쏘기 시험을 보아 상을 줄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신묘년분의 평양부의 전세인 쌀과 콩 도합 4백여 석을 탕감하여 구휼에 특별히 힘쓴다는 뜻을 보일 것과, 본부의 출신·사인·향리·관군·공천 등에게 성 밖 연무정(演武亭)에서 활쏘기 시험을 보이고 상격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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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왜적과 싸우다 죽은 봉사 홍승렬, 난복 형제 등을 추증하자고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평산(平山)의 의병장 훈련봉사 홍승렬(洪承烈)은 병으로 자기집에 앓아 누워 있다가 적을 만나 굽히지 않고 싸워 수급 넷을 베고서 어미와 부인 및 자신까지 함께 도륙을 당하였습니다. 평양부의 종인 난복(難福)·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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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도에 있는 병마의 숫자를 헤아려 개진하다.
답보하면서 헤아려 개진한 것은 다음과 같다.
경기도 강화부(江華府)에 주차(駐箚)한 전라도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000명, 경기도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00명,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000명, 의병장 우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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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을 탈환한 것에 대해 중국 조정에 주본을 전하다.
상이 신안관(新安館)에 행행하여 궐패를 설치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재배한 다음 영하(寧夏) 평정을 하례한 표문과 평양(平壤)을 탈환한 데 대한 주본을 사신 이조판서 한준(韓準)에게 친히 전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정월 9일에 배신 제도체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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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가 평양인민의 수를 이원익에게 물어 주선하자고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었다.
“예조판서 윤근수(尹根壽)의 서계에 ‘장기고(張旗鼓)가 물은 「평양부의 사람은 반드시 그 수가 있을 것이니 부디 속히 조사해 가지고 오라.」 고 한 것은 아마 제독이 우리나라 사람을 죽여서 자기의 공으로 삼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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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가 이제독을 평양부에서 접견할 날짜를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제독(李提督)을 평양부에서 접견하는 일을 일관이 택일하였는데 22일은 너무 임박하여 접대할 물건 등을 미처 조치하지 못할 것이고, 25일은 너무 먼 듯하므로 감히 여쭙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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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관해 아뢰다.
6401. 홍문관이 이순신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관해 아뢰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관하여 전례를 고찰한 다음 아뢸 것을 전교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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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이여송이 평양에 진군하여 싸워 이긴 뒤 승첩을 상주하게 하다.
다음날【6일】진군하여 평양에 접근하였다. 제독이 대군을 서둘러 행군시키자 도원수도 제진의 군사를 합쳐 거느리고 그 뒤를 따랐다. 군사를 나누어 에워싸니 적은 성에 올라가 굳게 지키면서 모란봉(牧丹峯)을 거점으로 높은 위치에서 총을 쏘아댔다. 제독이 진정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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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가 평양부 서면 주동에 주정하다.
대가가 평양부 서면 주동(鑄洞)의 막차(幕次)에 주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