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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급사에게 군사 ․ 병마 ․ 군량 ․ 성곽 수선 등에 대해 회자하다.
서급사(徐給事)에게 회자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돌이켜보건대 본직은 재주가 용렬하고 형세 또한 어려워서 난리를 당한 지 7년이 되도록 스스로 떨쳐 일어서지 못하고 번거롭게 군사의 도움을 요청하여 두 차례 성대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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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수비를 의논하다.
도성의 수비를 의논하였다. 우상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이진(李戩)·변언수(邊彦琇)·신각(申恪)을좌우중위대장(左右中衛大將)으로, 상산군 박충간(朴忠侃)을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로, 칠계군 윤탁연(尹卓然)을 부순검사로 삼고, 전 판서 김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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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3일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자 이양원 ․ 김명원이퇴주하다.
이달 3일에 왜적이 경성에 침입하자 이양원(李陽元)·김명원(金命元)이 퇴주하였다. 당초 적은 동래에서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로 양산(梁山)·밀양(密陽)·청도(淸道)·대구(大丘)·인동(仁同)·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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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보내 부원수 신각을 참하다.
사신을 보내어 부원수 신각(申恪)을 참하였다. 신각은 처음에 부원수로서 김명원(金命元)을 따라 한강에서 방어했었는데, 명원의 군사가 패하자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楊州)에 와서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였다. 마침 응원하러 온 함경병사(咸鏡兵使) 이혼(李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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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보를 이조판서로 삼고, 한응인을 제도 순찰사로 삼아 임진에 주둔케 하다.
이산보(李山甫)를 이조판서로, 이항복(李恒福)을 이조참판으로 삼고, 한응인(韓應寅)을 제도 순찰사로 삼아 임진(臨津)에 나아가 주둔하게 하였다. 적이 경성에 들어와서 며칠 동안 군사를 휴식시켰는데, 도로에 와전되기를 ‘왜인들이 멀리서 오느라 발이 부르트고 피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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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장 조헌이 청주성을 회복하다.
의병장 조헌(趙憲)이 청주성(淸州城)을 회복하였다.
조헌이 처음에 수십 명의 유생과 뜻을 모아 의병을 일으킨 뒤 공주(公州)와 청주 사이에 가서 장정을 불러 모으니 응하는 자가 날마다 모여들었다. 그러자 순찰사와 수령이 관군에게 불리하다고 여겨 갖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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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의 공격으로 기세가 꺾인 적을 치고자 하였으나 제독이 따르지 않다.
당시 관군이 기내에 나누어 웅거하면서 권율(權慄)의 군사를 위시하여 들락날락하며 적을 치니, 적이 멀리 나가서 땔나무를 할 수 없었다.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전라수사 이빈(李薲),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수군을 이끌고 경강(京江) 어구에 진격하였으며, 하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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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에 주둔하던 왜장들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해상으로 돌아가다.
경성에 주둔하던 왜장들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해상으로 돌아갔다.
송응창(宋應昌)이 막하의 책사인 사용재(謝用梓)·서일관(徐一貫) 등으로 하여금 중국 사신으로 가장하여 적영에 들어가서 행장(行長) 등을 개유하게 하고, 심유경(沈惟敬)에게 말하게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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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건을 진주사로 삼아 경리 양호를 변호하는 주문을 보내다.
최천건(崔天健)을 진주사로 삼았는데, 그 주문에 이르기를,
“경리도찰원(經理都察院) 사후배신(伺候陪臣) 한응인(韓應寅)이 말하기를 ‘본원이 사직하는 상소를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외간(外間)의 말을 들으니 ‘양도야(楊都爺)가 도산(島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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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답사 여우길 ․ 경섬, 서장관 정호관 등을 일본에 파견하다.
회답사 여우길(呂祐吉)·경섬(慶暹), 서장관 정호관(丁好寬)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원가강(源家康)이 신사를 여러 번 청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은 사행의 명칭 붙이는 것을 어렵게 여겨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가강이 서계를 보내 굳이 청하므로 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