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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賢의 논평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거란은 탐욕스럽고 포악하여 믿을 수 없는 나라이므로 태조께서는 크게 그들을 경계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친 재앙 재앙 대조영(大祚榮)의 후손인 대연림(大延琳)이 1029년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을 지내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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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의 논평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시(詩)라는 것은 마음에 품은 뜻이 나타나는 것으로, 마음에 있을 때는 지(志)가 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선종께서 문덕전에서 지은 「이약시(餌藥詩)」를 보니, 조맹(趙孟)의 「시음개일(視蔭愒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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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의 논평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우(禹)임금이 왕위를 아들에게 전한 것은 후세에 벌어질 일을 염려해서였다. 유복자를 왕으로 세워 세워 이는 『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에 “植遺腹朝委裘 而天下不亂”이라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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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의 논평
이제현(李齊賢)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왕은 예전에 유승단(兪升旦)에게서 배웠으며 5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이는, 배운 것으로 자기의 덕을 쌓고 늘 근신하는 자세로 왕위를 보전하므로 백성들이 기뻐하고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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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5년(1313) 계축년
봄 정월
초하루 신묘일. 왕이 원나라에 체류했다.
기미일. 양광도․전라도․서해도의 정부(丁夫) 5백 명을 징발해 연경궁(延慶宮) 축조공사에 동원하는 한편 처음으로 민천사(旻天寺)에서 불상을 주조했다.
2월
을축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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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3년(1316) 병진년
봄 2월
병자일. 공주의 영구가 원나라로부터 도착하자 백관들이 검은 관과 소복차림으로 도성 바깥에서 맞아다가 영안궁(永安宮)에 빈소를 차렸다.
경인일. 공주의 장례를 치렀다. 상왕이 황제에게 왕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황제에게 요청함에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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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4년(1317) 정사년
봄 정월
무오일. 왕이 영왕(營王)의 요청에 따라 친히 동녀(童女)를 뽑았다.
정묘일. 왕이 총애하는 기생 만년환(萬年歡)의 집에 미행(微行)해 은폐(銀幣)를 듬뿍 내려주었다.
윤 정월
경오일. 왕과 공주가 정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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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7년(1320) 경신년
봄 정월
초하루 신사일. 원나라로부터 일식이 발생할 것이라는 통보가 왔으므로 신년 하례의식을 정지하고 백관들이 소복차림으로 대기했으나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다.
계미일. 신년 하례행사를 거행했다.
신묘일. 총부전서(摠部典書) 윤석(尹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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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10년(1323) 신해년
봄 정월
○왕이 원나라에 체류했다.
○ 유청신(柳淸臣)과 오잠(吳潛)이 도성(都省)에 글을 올려 본국에 성(省)을 설치해 성을 설치해 충숙왕 10년(1323) 심왕(瀋王) 왕호(王暠) 옹립운동을 전개하던 유청신(柳淸臣)․오잠(吳潛) 등이 주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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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왕 11년(1324) 갑자년
봄 정월
○ 왕이 원나라에 체류했다.
경인일. 연경궁(延慶宮)의 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갑인일. 황제가 왕에게 환국을 명령하고 다시 국왕의 인장(印章)을 하사했다.
병진일. 황제가 보라태자[孛刺太子]를 우리나라 대청도(大靑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