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高麗史)』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우리 나라 2대 정사의 하나이다. 고려시대사 연구에 필수적인 사료일 뿐아니라 전근대 우리 문물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물론 조선 초기의 고려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었고, 특히 고려말의 사실에 대해서는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개입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려사』를 편찬하는 데 있어서 고려의 역대 실록(實錄)이 그 중심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당대에 활동했던 인물들인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의 『금경록(金鏡錄)』, 최윤의(崔允儀)의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번국예의(蕃國禮儀)』,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역옹패설(櫟翁稗說)』, 김구용(金九容)의 『주관육익(周官六翼)』 등과 같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 당시의 사실을 전해주는 것이고, 사료적 가치도 그만큼 높다 하겠다.
1. 『고려사』의 편찬과정
『고려사』는 조선 문종 1년(1451)에 완성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부터 고려사를 편찬하려 했던 시도가 60여 년만에 결실을 맺은 것인데, 편찬에 이르기까지는 몇 차례의 개찬(改撰) 과정을 거치고 있다. 정도전(鄭道傳)을 비롯한 조선 건국 주도세력은 건국 직후인 태조 1년(1392) 10월 고려사 편찬에 착수하였으며, 그것은 태조 4년 1월 『고려국사(高麗國史)』의 편찬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편년체 『고려국사』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정도전의 『경제문감(經濟文鑑)』 별집 군도편(君道篇),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정총(鄭摠)의 서문을 통해 그 내용을 대강 엿볼 수 있다. 『고려국사』는 정도전이 그 편찬을 주도하였지만, 실무적인 편찬작업을 예문춘추관 소속 관료들이 담당했다는 점에서 관찬 사서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서, 그 기본 자료는 고려 실록과 고려말의 사초(史草)였다. 이 사서에는 성리학적 성격을 지닌 유교사관(儒敎史觀)과 사대사관(事大史觀), 재상중심의 정치사상이 반영된 것으로서 건국 주도세력이 건국의 정당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해된다.
『고려국사』는 건국 직후 짧은 기간 동안에 편찬되었고, 건국 주도세력의 주관이 개입되어 여러 문제를 드러낸 데에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숙청되는 등 정치적 격변을 겪으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어 개편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편찬자료를 널리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내용이 소략하게 되어 빠진 사실이 많다는 점, 사실(史實)에 대한 필삭(筆削)과 인물에 대한 포폄(褒貶)이 공정치 않아 그 내용에 오류가 많다는 점, 유교적․사대적 역사인식이 반영됨으로써 참의(僭擬)한 일을 낮춰 써서 당시 사실을 매몰시킨 점 등이 지적되었다.
『고려국사』에 대한 개수(改修) 작업은 태종 14년(1414)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다음의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윤(河崙)을 불러서 『고려사』를 찬정(撰定)하라고 명하였다. 국초에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하였으나, 위조(僞朝) 이후의 기사는 자못 사실과 다른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는데, 대개 하윤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태종실록』 권27, 태종 14년 5월 10일 임오)
○ 영춘추관사 하윤(河崙)․감춘추관사 남재(南在)․지춘추관사 이숙번(李叔蕃)․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고려사』를 개수(改修)하게 하였다. 임금이, “공민왕 이후의 일은 사실이 아닌 것이 많으니, 마땅히 다시 찬정(竄定)하라.”고 하였다.(『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8월 7일 정미)
○ 영춘추관사 하윤과 지관사(知館事) 한상경(韓尙敬)과 동지관사(同知館事) 변계량이 『고려사』를 3분하여 그 집에서 개수하였다. 하윤이 춘추관의 장무(掌務) 김원로(金元老)를 불러서 말하기를, “더운 때에 날마다 모여서 근무하는 것은 편하지 못하다. 전조(前朝)의 충정왕(忠定王) 이전의 역사를 마땅히 셋으로 나누어 그 하나는 나에게 보내고, 그 하나는 지관사(知館事)의 집에 보내고, 그 하나는 동지관사(同知館事)의 집으로 보내면 우리들이 나누어 보고 찬정(竄定)하겠다.”하였으나, 이 해 겨울에 하윤이 졸(卒)하여, 일은 마침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태종실록』 권31, 태종 16년 6월 20일 경진)
태종의 개수 명령은 하륜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서 위조(僞朝), 즉 우․창왕 이후의 기사에 사실과 다른 것이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공민왕대 이후 태조 이성계의 활동에 대한 서술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조선건국 과정에 대한 서술이 이성계보다 정도전을 비롯한 사대부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 14년 8월부터 시작된 『고려국사』에 대한 개수 작업은 하윤(河崙)․한상경(韓尙敬)․변계량(卞季良)이 중심이 되어 공민왕대 이후의 서술은 공동으로 검토하고, 충정왕(忠定王)대 이전의 서술은 3명이 분담하여 검토하는 등 어느 정도 진전되는 듯했으나, 태종 16년 겨울에 하윤이 사망함으로써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고려국사』에 대한 본격적인 개편 작업은 세종대에 추진되었다. 다음에 보이는 바와 같이 세종은 즉위하면서부터 개수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 경연에 나아가 임금이 말하기를, “『고려사』에 공민왕 이하의 사적은 정도전이 들은 바로써 더 쓰고 깎고 하여, 사신(史臣)의 본 초고(草稿)와 같지 않은 곳이 매우 많으니, 어찌 후세에 믿음을 전할 수 있으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변계량(卞季良)과 정초(鄭招)가 아뢰기를, “만약 끊어버리고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면, 후세에 누가 전하께서 정도전이 직필(直筆)을 증손(增損)한 것을 미워하신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고쳐 짓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세종실록』 권2, 세종 즉위년 12월 25일 경자)
세종은 정도전의 『고려국사』를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극언하면서 이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였다. 공민왕대 이후의 사실이 자의적으로 첨삭(添削)되어 본래의 초고(草稿)와 다른 것이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유관(柳觀)․변계량이 주도한 이 교정작업은 세종 3년(1421) 1월 30일에 완성되었는데, 세종은 경연(經筵)에서 그 진척 상황을 점검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이번의 개수 작업은 사신(史臣)의 초고와 다른 것을 바로잡고, 제(制)나 칙(勅), 태자(太子) 등과 같이 제후국의 격에 맞지 않다 하여 이를 고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유관 등의 개수작업은 사대명분론에 입각하여 『고려국사』보다도 더 심하게 개서(改書)한 것으로서 직서(直書)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세종은 이를 반포하지 않았다.
세종은 왕 5년 12월 지춘추관사 유관과 동지춘추관사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다시 개수에 착수하도록 하였다. 이 개수작업은 8개월이 걸려 세종 6년(1424) 8월 11일 『수교고려사(讎校高麗史)』로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세종의 직서주의가 반영되어 국왕의 묘호(廟號)․시호(諡號)를 직서케 하고, 태후(太后)․태자(太子) 및 관제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수교고려사』 또한 반포되지 않았다. 개수에 참여했던 변계량이 직서주의에 반발함에 따라 세종이 이를 일단 수용하여 반포를 유보한 것이다.
『수교고려사』의 반포가 유보된 후 고려사 개수 작업은 상당 기간 중단되었다. 세종이 다시 고려사 개수의 의지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왕 13년부터이다. 세종은 13년(1431) 1월 25일의 경연에서 『고려사』가 종(宗)을 고쳐 왕이라 한 것은 그 진상을 멸실(滅失)한 것이라 규정하고,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에게 『태종실록』 편찬이 끝나는대로 개수작업에 착수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세종 14년 8월 10일에는 춘추관에 전지(傳旨)하여 고려사의 수찬(修撰) 방법을 논의하도록 하고, 편년체와 강목체 가운데 편년체 방식으로 수찬할 것을 결정하였다. 맹사성(孟思誠)․권진(權軫)․신장(申檣)․정인지(鄭麟趾)․김효정(金孝貞)․설순(偰循) 등이 ‘역사의 기록은 편년(編年)이 있고 난 후에 강목(綱目)이 있다’는 의견에 대해 세종은 이에 뜻을 같이하면서 편년의 필법으로 수찬(修撰)하여, 차라리 번거로운 데에 실수가 있더라도 소략하여 사실을 빠뜨리지 말게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고려사 개찬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세종 20년 3월부터이다.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편년체를 기전체(紀傳體)로 하자는 논의도 이 때 처음으로 제기되었고, 우왕과 창왕의 처리 문제도 논의되었다. 세종 20년 7월 8일, 춘추관은 정도전의 『고려국사』에서 우(禑), 창(昌)이라고만 쓴 데 대하여 역대의 역사 서술방식과 어긋난다고 지적하고, 공민왕이 우왕을 자기 아들이라고 지칭한 점, 원(元)에서 작명(爵名)까지 받았던 점, 14년 간이나 왕위에 있었던 점 등을 들어 ‘폐왕 우(廢王禑)’, ‘폐왕 창(廢王昌)’으로 쓸 것이며, 재위 기간 동안의 사실에 대해서는 ‘왕(王)’ 혹은 ‘상(上)’으로 지칭함으로써 사실을 인멸하지 말 것을 주장했는데, 세종은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같은 논의과정을 거치면서 편수작업을 수행하여, 마침내 세종 24년(1442) 8월 12일 감춘추관사 신개(申槩)․지춘추관사 권제(權踶)의 이름으로 『고려사』 찬술이 완료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이 『고려사』는 뒷날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 『권초(權草)』, 『홍의초(紅衣草)』라 불리었다. 편년체로 찬술된 이 책은 철저히 직서주의에 입각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세종 21년 1월 12일의 경연에서 세종이 편수에 참여하고 있던 검토관 이선제(李先齊)에게 왕씨가 용의 자손이라고 한 것은 황당하지만 후세에 전할 필요가 있으니 그대로 쓰라고 한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세종의 『고려사』 수찬에 대한 의지는 『고려사전문』의 찬술로 그치지 않았다. 그 반포를 미루어둔 채, 세종 28년 10월에 다시 교정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임금이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李季甸)과 응교(應敎) 어효첨(魚孝瞻)에게 이르기를, “『고려사』는 처음 찬술한 것이 매우 간략하여 후에 다시 더하여 넣었지만, 빠진 일이 많이 있다. 요(遼)나라에서 고려의 세자에게 면복(冕服)을 내려 준 일을 오히려 쓰지 아니하였으니 그 나머지를 알 수 있겠다. 지금 다시 교정해야 되겠다. 또 환조(桓祖)께서 만호(萬戶)로서 삭방(朔方)에 간 데 대하여 대간(臺諫)이 그치기를 청했던 일과 용비시(龍飛詩)에 태조께서 승천부(昇天府)에서 접전(接戰)하던 상황을 첨입(添入)했던 것은, 비록 속언(俗諺)에는 전함이 있으나 역사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이 일로 미루어 본다면 반드시 유루(遺漏)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대들은 여러 사관들과 더불어 사초(史草)를 자세히 상고하여, 위에서 도조(度祖)와 환조로부터 태조에 이르기까지 행한 자취를 찾아서 아뢰게 하라.”하였다.(『세종실록』 권114, 세종 28년 10월 11일 을사)
이때 세종은 요나라에서 고려 세자에게 면복(冕服) 내려 준 사실이 기록되지 않았음을 들어 『고려사전문』에도 빠뜨린 사실이 많을 것이라 하고 이를 보완하게 하였다. 특히 도조(度祖)에서부터 태조에 이르기까지의 자취를 찾아서 보고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성계 선대의 활동을 보완하는 데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려사전문』에 대한 보완 작업을 거치고 양성지가 감수와 교정 작업을 마쳐 세종 30년(1448)에 마침내 주자본으로 인쇄에 들어감으로써 『고려사』 편찬과 간행이 완료되는 듯 했다. 그러나 편찬을 담당했던 권제가 남의 청탁을 받아 고쳐 쓰고, 자신의 조상에 대한 기술을 사실과 다르게 기록하는 등 수사(修史)에 공정성을 잃었다는 비판이 터져나오면서 『고려사전문』의 반포는 중지되고 말았다.
『고려사전문』의 반포를 정지시킨 후 세종은 곧 『고려사』 개수작업을 지시하였다. 세종 31년 1월 4일 춘추관에 전지(傳旨)하여, 다시 교정하되 비록 한 글자와 한 가지 일이라도 빠져서 고쳐야만 할 일은 모두 다 표를 붙여서 보고하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어서 1월 28일에는 『고려사』의 전면적 개찬작업을 명하고 있다.
○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鄭昌孫)을 불러, 『고려사』의 개찬(改撰)에 대해 의논하고 이어서 춘추관에 전지하기를, “『고려사』가 자못 지나치게 소략(疎略)하니, 이제 다시 고열(考閱)하여 자세히 보태어 넣으라.” 하고, 드디어 우찬성 김종서․이조판서 정인지․호조참판 이선제(李先齊)와 정창손에게 감장(監掌)하기를 명하였다.(『세종실록』 권123, 세종 31년 1월 28일 기유)
세종의 의도는 『고려사전문』을 단순히 교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고려사를 개수하려는 것이었다. 같은해 2월 5일에는 『고려사』 편찬체재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여 편년체에서 기전체로 전환하여 서술하기로 결정하였고, 4월 6일에는 우왕과 창왕의 처리문제를 논의하여 열전에 편입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현재 전하고 있는 『고려사』의 편찬 작업은 이렇게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의 개수작업은 그 동안의 편년체 서술 방식에서 기전체로 전환하는 등 편찬체재 자체가 바뀌었으며, 이에 따라 우․창왕대의 사실을 반역 열전에 수록하는 등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김종서(金宗瑞) 등이 새로 편찬한 『고려사』를 바치니,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연표(年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이었다.…임금이 말하기를, “춘추관에서 역사를 편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경들과 같이 속히 이룬 적은 아직 없었다. 이와 같은 큰 전적(典籍)을 몇년이 안되어 잘 지어서 바치니, 내가 대단히 가상히 여긴다.”하고, 드디어 명하여 음식을 내려 주고 이어서 김종서 등에게 말하기를, “춘추관의 일은 이미 끝났는가?”하니, 김종서 등이 아뢰기를, “이는 전사(全史)입니다. 그 번거로운 글을 줄이어 편년(編年)으로 사실을 기록한다면 읽어 보기가 편리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속히 편찬토록 하라.”하였다.(『문종실록』 권9, 문종 1년 8월 25일 경인)
『고려사』는 개수작업을 시작한지 2년 7개월 만에 총 139권의 규모로 완성되었다. 문종이 지적했듯이 다른 시기의 개수작업에 비하면 짧은 기간 안에 이를 완성한 셈이다. 더욱이 정도전의 『고려국사』가 37권 규모였던 데 비하면 양적으로도 4배에 가까운 분량이었다. 이를 2년 동안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인원이 수사관(修史官)으로 참여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편찬 당시 수사관은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희생되어 그 명단에서 빠진 김종서를 포함하여 정인지 등 모두 33명이나 되었다. 『고려사』는 수사관(修史官)들이 그 내용을 분담하여 편찬하였다. 세가․지․연표는 노숙동(盧叔仝)․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양성지(梁誠之)․이예(李芮)․윤기견(尹起畎)․윤자운(尹子雲) 등이, 열전은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유성원(柳誠源)․이극감(李克堪) 등이 분담하여 찬술하였으며,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허후(許詡)․김조(金銚)․이선제(李先濟)․정창손(鄭昌孫)․신석조(辛碩祖) 등은 이를 산삭(刪削)․윤색(潤色)하였다.
이처럼 『고려사』가 완성되기까지에는 몇 차례에 걸쳐 개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태조 4년 정도전․정총의 『고려국사』가 편찬된 후, 태종 14년 5월 하윤․남재(南在)․이숙번(李叔蕃)․변계량 등에 의해 개찬작업이 시작되었다. 세종 원년부터 3년까지는 유관․변계량이, 세종 5년부터 6년까지는 유관․윤회에 의해 개찬작업이 진행되어 『수교고려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세종 13년경부터 권제․안지(安止)․남수문(南秀文) 등이 개찬작업을 담당하여 세종 24년 『고려사전문』이 완성되었으나 반포되지 못했고, 마침내 문종 원년에 현재 전하고 있는 기전체 『고려사』가 빛을 보게 되었다. 이같이 『고려사』가 완성되기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고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편찬체제의 변화는 물론 소략했던 내용이 보충되고, 인물평가 문제 등 오류가 어느 정도 시정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2. 『고려사』의 체재와 구성
1) 기전체 『고려사』의 성립
『고려사』는 총 139권의 기전체 사서(史書)이다. 본래 편년체로 서술된 『고려국사』가 기전체로 전환하는 과정에는 몇 차례의 논의가 있었다. 편찬체재를 기전체로 하자는 논의가 처음으로 제기된 것은 『수교고려사』 개수작업이 추진되고 있던 세종 20년 3월의 일이다. 당시 경연에서 승지 허후는 강목체와 기전체를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 임금이 경연에 나아가니 승지 허후(許詡)가 시강(侍講)하였다. 허후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이 일찍이 편수관이 되어 본관에서 편찬한 『고려사』를 보았는데, 그 체재가 타당하지 않은 듯하였습니다. 옛부터 역사서를 짓는 데에는 두 가지 체재가 있었습니다. 좌씨(左氏)는 연대를 경(經)으로 하고 나라를 위(緯)로 하였으며, 반고(班固)와 사마천(司馬遷)은 나라를 경으로, 연대를 위로 하였는데, 역대로 역사서를 짓는 데에는 모두 반고와 사마천을 모방하였으나, 홀로 온공(溫公)만은 좌씨를 의거하였으니, 그것은 본사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려 때에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사략』이라 한 것은,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흥하고 쇠한 일의 대개만을 서술하여 당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 것이었으나, 초고(草稿)만 갖추었을 뿐이고 책은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국초에 와서 정도전․권근(權近)․하윤․윤회 등이 서로 잇달아서 찬수하였으나, 모두 이제현(李齊賢)의 것을 따라서 너무 소략하였으므로 다시 증보하도록 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략한 폐단을 면하지 못하였고 또 역대로 편수한 역사서의 체재가 같지 않으니, 다시 반고․사마천의 체재에 따라 기(紀)․전(傳)․표(表)․지(志)를 지어서 본사(本史)를 만들기를 청하오며, 이어 윤회가 지은 것으로 사략을 만들면 거의 옛사람이 지은 역사서의 체재에 맞을 것입니다.” 임금이 즉시 지관사(知館事) 권제(權踶)를 불러서 묻기를, “허후의 말이 어떠냐.”하니, 권제가 대답하기를, “허후의 말은 신도 또한 들었으나 다만 『고려사』는 본초가 소략한데, 만약 기(紀)․전(傳)․표(表)․지(志)로 구분하면 더구나 사기의 체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하였다.(『세종실록』 권80, 세종 20년 3월 21일 을사)
허후는 역대 사서(史書)의 체재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같은 기전체였음을 상기시키면서, 『고려사』도 기전체 방식으로 다시 편찬되어야 하며, 그 동안 편년체 방식으로 개찬해온 윤회의 『수교고려사』는 별도의 『사략(史略)』으로 처리하면 된다고 주장하였다. 허후의 이같은 의견은 고려사의 본초(本草)가 소략하여 기전체로 개편하기 어렵다는 지춘추관사 권제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허후의 입장은 뒷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로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선구적이라 할 수 있다.
『고려사』의 체재는 세종 31년 2월 5일 춘추관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여 기전체로 확정되었다. 이날 춘추관의 의견은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기전체로 전환하자는 입장과 이제까지의 방식인 편년체로 개수하자는 주장이 그것이다. 사관(史官)인 신석조(辛碩祖)․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이석형(李石亨)․김예몽(金禮蒙)․하위지(河緯地)․양성지(梁誠之)․유성원(柳誠源)․이효장(李孝長)․이문형(李文炯) 등은 기전체로 서술할 것을 주장하였다. 중국 역대 사서가 기전체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 편년체는 기전체의 본사(本史)를 읽기 쉽게 만들 때 쓰는 서술방식이므로 본사가 없는데 편년체로 요약하면 사체(史體)를 잃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기전체로 서술하는 일이 어렵고 기간이 많이 걸린다 하여 편년체 방식을 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면에 어효첨(魚孝瞻)․김계희(金係熙)․이물민(李勿敏)․김명중(金命中) 등은 이것이 개찬(改撰)인 만큼 편년체 서술방식을 그래도 따르자고 주장하였다. 이들도 기전체 서술방식이 상례(常例)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일이 쉽지 않아 기간이 많이 걸린다는 점, 체례(體例)가 빠지고 간략하여 이룩되더라도 볼만한 것이 못될 것이라는 점 등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송사(宋史)』의 전문(全文)의 예에 따라 교정을 더하여 예전과 같이 편년체로 반행(頒行)하고, 만일 기전체의 고려사가 필요하다면, 이는 후일을 기다리자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춘추관의 논의가 이처럼 나누어져 결정되지 못하자 지춘추관사 김종서와 정인지는 두 논의를 가지고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세종은 처음에는 어효첨 등의 주장인 편년체 서술방식을 따르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종서 등이 세자인 문종에게 편년체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신석조 등이 주장한 기전체를 채택하도록 요청하자, 문종이 세종을 다시 설득하여 기전체 서술방식으로 확정하게 하였다. 다만 본기(本紀)는 대의명분을 바르게 한다는 차원에서 세가(世家)라 지칭하였다.
편찬체재가 기전체로 확정되자 우왕과 창왕대 사실의 처리가 문제가 되었다. 이제까지는 한(漢)나라 소제(少帝)와 송(宋)나라 창오왕(蒼梧王)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왕으로 칭해 왔는데, 이제 기전체 방식을 택함으로써 이를 세가와 열전 어느 쪽에 수록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춘추관에서는 다음과 같이 열전에 수록한다는 원칙을 세워, 이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전에 『고려사』를 편수할 때에 한(漢)나라 소제(少帝)와 송(宋)나라 창오왕(蒼梧王)의 고사(故事)에 의거하여 위조(僞朝)의 신우(辛禑) 부자를 모두 왕으로 칭하였습니다.…지금 만일 오히려 우와 창을 왕으로 하여 역적의 자손으로 하여금 32대의 서열(序列)에 섞어서 분별이 없게 한다면, 다만 대의에 어그러질 뿐이 아니라, 태조(이성계)의 명분을 바로잡으신 의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제후(諸侯)를 폐하고 두는 것은 천자에게 달려있는 것이온데, 하물며, 우가 타성(他姓)으로서 도둑질로 점유하여, 위로는 천자(天子)의 끊은 바 되고, 아래로는 국론(國論)의 폐한 바 된 것이겠나이까.…전자에 정도전 등이 역사를 편수할 때에 우와 창을 이름으로 썼고, 그 뒤에 하윤․유관(柳寬)․변계량 등이 수교(讎校)하고, 윤회가 거듭 편찬할 때에도 또한 모두 그대로 하였사오니, 어찌 소견이 없어서 그랬겠나이까. 바라옵건대, 지금 『고려사』를 편수함에 있어서 우․창 부자를 모두 『한서』 왕망의 예에 의하여, 명분을 바르게 하고 난적(亂賊)을 징계하여 만세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권124, 세종 31년 4월 6일 을묘)
우․창왕을 처음으로 왕이라 칭하게 되는 것은 세종 24년에 개찬(改撰)된 권제의 『고려사전문』에서였는데, 춘추관에서는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의 예에 따라 반역전에 수록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 난적을 징계한다’는 것이었지만, ‘태조의 명분을 바로잡으신 의리’에 어긋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즉 이성계파가 공양왕을 옹립하면서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우․창왕을 왕으로 칭하는 것은 여기에 어긋날 뿐아니라 조선건국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강등시켜 반역열전에 수록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2) 『고려사』의 구성
『고려사』는 세가(世家) 46권, 지(志) 39권, 표(表) 2권, 열전(列傳) 50권, 목록(目錄) 2권 등 총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려사』 첫머리에는 정인지가 쓴 ‘『고려사』를 올리는 전(箋)’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고려시대 매 시기에 대한 평가와 조선건국의 당위성, 『고려사』 편찬과정 등을 서술하였다. 다음으로 김관의의 『편년통록』과 민지의 『편년강목』을 참고하여 서술한 ‘고려세계(高麗世系)’를 두어 호경(虎景)에서 왕건(王建)에 이르는 세계(世系)를 소개하였다. 이어서 『고려사』 편찬에 참여한 인물들의 명단인 ‘수사관(修史官)’, 서술원칙인 ‘찬수고려사범례(纂修高麗史凡例)’, ‘목록’을 차례로 수록하였다.
『고려사』 권1~46권은 국왕의 연대기인 세가(世家)로서 태조에서 공양왕대까지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 권47~85는 지(志)로서, 천문(天文)․역(曆)․오행(五行)․지리(地理)․예(禮)․악(樂)․여복(輿服)․선거(選擧)․백관(百官)․식화(食貨)․병(兵)․형법지(刑法志) 순으로 서술하였으며, 권86~87은 표(表)인데 연표를 수록하고 있다. 권88~137은 열전(列傳)으로, 후비(后妃)․종실(宗室)․제신(諸臣)․양리(良吏)․효우(孝友)․열녀(烈女)․방기(方技)․환자(宦者)․혹리(酷吏)․폐행(嬖幸)․간신(姦臣)․반역전(叛逆傳) 등으로 분류하여 차례로 서술하고 있다.
「세가(世家)」에서는 태조에서 공양왕에 이르는 국왕 관련 기사를 수록하였다. 34명의 국왕 가운데 우․창왕은 열전에 강등되었기 때문에 32명의 왕기(王紀)만 있게 된 것이다. 「세가」는 『고려사』 전체의 33.6%나 되는데, 다른 기전체 사서(史書)의 본기(本紀)에 비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구당서(舊唐書)』 본기가 10%, 『송사(宋史)』가 9.5%, 『원사(元史)』가 22.4%에 그쳤던 것에 비하면 높은 비율이다. 이는 『고려사』가 국왕 중심의 역사 서술 태도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범례를 통해서 보면, 「세가」는 『한서』와 『후한서』, 그리고 『원사』에 기준하여 사실과 언사(言辭)를 모두 기록하였고, 종(宗)․폐하(陛下)․태후(太后)․태자(太子)․절일(節日)․제(制)․조(詔)와 같은 칭호도 당시 불려졌던 바에 따라 그 사실을 그대로 두었다. 원구(圓丘)․적전(籍田)․연등(燃燈)․팔관(八關) 등과 같은 상례적인 일은 처음 보이는 것만 써서 그 예(例)를 나타내고 왕이 몸소 행하였으면 반드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러한 직서(直書)의 원칙은 군주의 권위와 고려 국가의 위신을 높이는 효과를 동시에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지(志)」는 고려 문물을 망라한 것으로서 고려시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부분이다. 「지」의 편제는 『원사』에 준하였는데, 『고려사』에 없는 것은 ‘하거지(河渠志)’ 뿐이다. 『원사』의 ‘예악지(禮樂志)’는 『고려사』에서 ‘예지’와 ‘악지’로 구분하였으며, ‘제사지(祭祀志)’는 ‘예지’에 포함시켰다. 「지」 39권 가운데 예지가 가장 많은 11권을 차지하고 있고, 여복지(輿服志)가 1권으로 가장 적으며, 나머지 각 지는 2~3권 씩 배정되어 있다. 『고려사』 각 「지」는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와 『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 및 제가(諸家)의 잡록(雜錄)을 취하여 작성되었으며, 그 내용은 연원이 없는 일반적 기사와 연월이 있는 편년적 기사 두 가지 형태의 기사가 있다. 각 「지」마다 첫머리에는 서문을 싣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려사』 편찬자들의 고려사 인식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표(表)」는 『삼국사기』의 형식에 따라 연표만 작성하였다. 중국의 역대 사서가 후비(后妃)․종실세계(宗室世系)․제왕(諸王)․제공주(諸公主)․삼공(三公)․재상표(宰相表) 등 다양하게 구성된 데 비하면 큰 차이가 있다. 연표는 당말(唐末) 오대(五代)․송(宋)․요(遼)․금(金)․원(元)․명(明) 등을 상국(上國)으로 분류하여 위에 쓰고, 고려를 그 밑에 배치하는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그 내용은 주로 왕의 연호․책왕(冊王)․견사(遣使)․탄훙(誕薨)․내란(內亂)․외란(外亂) 등 군주 및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와 관련되는 사건들만 기록하였다.
「열전(列傳)」 50권은 후비전에서 반역전에 이르기까지 13개의 열전으로 분류․편성되었다. 이 가운데 제신전(諸臣傳)이 29권으로 가장 많은 분량이고, 그 다음이 반역전으로 11권이며, 후비․종실․폐행․간신전이 각각 2권이다. 양리․충의․효우․열녀․방기․환자․혹리전 등 7개의 열전은 나머지 2권에 수록되어 있다. 중국 역대 사서의 열전에는 반신전(叛臣傳)과 역신전(逆臣傳)이 나누어져 있는데, 『고려사』에서는 반역전으로 한데 묶여 있다. 우․창왕대의 기사는 바로 이 반역전에 강등되어 있으며, 그 분량은 2권에 달한다. 폐행전이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송사』 영행전(侫幸傳)의 영향으로 보이며, 여기에는 대부분 원간섭기에 활동했던 인물들이 실려 있다.
「열전」은 『고려사』 전체의 36.5%를 차지하고 있다. 『구당서』 열전이 75%, 『송사』가 66.7%, 『원사』가 46.2%인 데 비하여 낮은 비율이다. 『고려사』에서 신하들의 활동을 서술한 「열전」이 「세가」보다 낮은 비중으로 처리되었다는 것은 여기에 군주 중심의 역사인식이 반영되었음을 의미한다. 왕실관계 인물들의 열전인 후비전과 종실전이 각각 2권이나 차지하고 있는 것도 그 결과라 하겠다. 각 「열전」에는 서문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 해당 열전을 싣는 목적을 서술하였다. 「열전」 소재 인물들이 부자(父子)관계의 경우는 부전(附傳)의 형식으로 같은 열전에 수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그 공적이 뛰어난 자는 비록 아버지와 아들이라도 따로 열전을 세우고 있다.
3. 『고려사』의 간행과 보급
문종 1년 8월 25일, 지춘추관사 김종서 등은 『고려사』 139권의 편수를 보고하였고, 이어서 5일 뒤인 8월 30일에는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고려사』 편수에 대한 임금의 재가를 요청하여 허락받음으로써 『고려사』 편찬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다. 이에 따라 편찬을 수행한 춘추관의 편수관들에게는 안마(鞍馬)의 하사와 3품 이하의 경우 한 자급씩 올려주는 포상이 이루어졌다.
『고려사』의 인간(印刊)은 춘추관의 요청으로, 편찬된 지 1년 여가 지난 단종 즉위년 11월 이후에야 시작되었다. 그동안 문종 2년 2월에 『고려사절요』를 편수하여 이를 인간하고 반포하느라 『고려사』의 간행은 즉시 이루어지 않았던 것이다.
○ 춘추관에서 『고려사』를 인쇄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그대로 따랐다.(『단종실록』 권4, 단종 즉위년 11월 28일 병술)
○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이 당상(堂上)의 의논을 가지고, “『고려전사(高麗全史)』는 사람들의 시비(是非)․득실(得失)이 역력히 다 기재(記載)되었으므로,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가 『고려전사』가 출간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를 알까 두려워하여 『고려사절요』만을 인간(印刊)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내부(內府)에만 보관하였습니다. 우리 동방 만세에 본받고 경계할 만한 책은 『고려사』와 같은 것이 없으니, 청컨대 『고려전사』를 인간하여 널리 펴소서.”라고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단종실록』 권12, 단종 2년 10월 13일 신묘)
즉위년(1452) 11월에 시작된 『고려사』의 간행이 언제 완료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적어도 단종 2년 10월 이전에는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때 인간된 『고려사』는 소량에 그쳤으며, 그것도 전국에 반포되지 않고 내부에만 보관하였다. 그 까닭에 대해 이극감은 황보인과 김종서가 『고려사』를 반포할 경우 사람들이 시비를 알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이 숙청당한 뒤에 그 책임을 이들에게 돌린 것이고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극감 등이 『고려사』의 대량 간행을 건의한 후에도 여전히 간행은 미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조가 집권한 후에도 『고려사』의 반포는 계속 요구되었다. 세조 2년(1456) 2월 20일의 경연에서 시독관으로 참여한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梁誠之)는 언로의 개방과 함께 『고려사』의 반포를 주장하였으며, 같은 해 3월 28일과 세조 12년 11월 4일의 상소에서는 무과 시험에 『고려사』의 진강을 강조하였다. 양성지의 『고려사』 반포 주장은 예종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 공조판서(工曹判書) 양성지(梁誠之)가 상서하였다. “… 1. 『고려사(高麗史)』를 반포하는 일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고려사』는 전조(前朝)의 치란(治亂)을 기록하여 후세의 권징(勸懲)이 되는 것이므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역란(逆亂)의 일을 말한다면 이른바 역란이라는 것은 역대의 역사에 모두 있는 것이니, 어찌 전조의 역사에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참칭(僭稱)한 일을 말한다면 전조의 태조(太祖)가 삼한(三韓)을 하나로 통일한 후 개원(改元)하여 종(宗)을 칭하였으며, 금(金)나라 사람은 높여서 황제(皇帝)라 하였고, 고황제(高皇帝)는 자신의 말을 성교(聲敎)라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참칭했다는 혐의가 되겠습니까? 이른바 번국(蕃國)은 기내(畿內)의 제후(諸侯)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근대(近代)의 일로 확대해서 말할 수 없다면, 지금 명(明)나라도 『원사(元史)』를 반행하니, 어찌 그 이목(耳目)이 미칠 것을 헤아리겠습니까? 만약 숨겨야 할 일이 있다면, 삭제하고서 행하면 될 것입니다. 비단 나라 안에서만 행할 것이 아니라, 『사략(史略)』과 같이 중국에 전하거나 일본에 전해도 또한 좋겠습니다. 이는 비단 일시의 계책이 아니고 만세의 무궁한 계책이 되는 것이니, 바라옵건대 우리 나라에서 찬술한 여러 서적 가운데 부득이한 비밀 문서 외에 『고려전사(高麗全史)』와 같은 것은 옛날대로 전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예종실록』 권6, 예종 1년 6월 29일 신사)
예종 1년(1469) 6월 양성지는 『고려사』의 반포를 다시한번 강조하였다. 『고려사』는 전조, 즉 고려시대의 치란(治亂)에 대한 중요한 기록으로서 후세의 권장과 징계의 거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공개해야 된다고 하였다. 나아가 국내에서만 유통할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 전해도 좋을 것이라고 하여 한걸음 더 진전된 의견을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양성지의 발언에는 이때까지 『고려사』가 반포되지 않았던 까닭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고려사』가 역난(逆亂)의 기록이 많다는 점, 참칭(僭稱)한 곳이 있다는 점 등이었다. 이에 대해 양성지는 역난이란 전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역대 어느 나라에서도 있었던 일이라는 점, 참칭이라고 하지만 고려를 중국 내의 제후의 영역과 비교할 수 없다는 점 등을 들어,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명나라에서도 『원사』를 반포하고 있을 정도인데, 이 때문에 반포를 중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반드시 숨겨야 할 일이 있으면 그 기록만 삭제하고 반포하는 방법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양성지의 『고려사』 반포 요구가 곧바로 받아들여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성종초부터 경연에서 강론 과목으로 『고려사』가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은 이미 『고려사』의 대량 인출(印出)과 반포가 이루어졌음을 짐작케 한다. 성종 5년(1474) 이후 경연에서는 『고려사』가 빈번히 강론 과목으로 활용되어, 불교관련 기록을 비롯한 각종 사건 기록이 토론의 대상이 되었으며, 후비전을 비롯한 각종 열전, 백관지 등이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성종 13년(1482) 2월 영안도(永安道) 관찰사가 경내의 주민들을 가르치기 위해 『고려사』를 내려달라고 요청한 바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사』의 대량 간행은 이미 이 시기 이전에 이루어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종 1년 4월 7일에 왕은 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척(鄭陟)에게 『고려전사(高麗全史)』를 내려 주고 있는데, 특정 개인에게 내려줄 정도라면 반포는 물론 『고려사』가 대량 간행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고려사』 판본 가운데 최고본은 을해자본(乙亥字本) 『고려사』이나 이 본이 언제 을해자로 간행되었는지 그 시기를 확인할 수는 없다. 을해자는 세조 1년(1455)에 주조된 것이므로, 이 활자가 주조되자마자 『고려사』를 인출(印出)했다면 그 시기는 세조년간까지 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고려사』를 대량 간행하여 반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성종년간으로 내릴 수밖에 없다.
○ 주강(晝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동지사(同知事) 이승소(李承召)가 아뢰기를, “일찍이 듣건대 세종께서 여러 사서(史書)를 다 인쇄하고자 하였는데, 『사기(史記)』와 『전한서(前漢書)』는 인쇄하였고, 그 나머지 사서는 끝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사기』와 『전한서』는 요즈음 사대부(士大夫)들의 집에 더러 있으나, 그 나머지 여러 사서는 겨우 비각(秘閣)에만 간직하고 민간에는 없기 때문에 배우는 자가 볼 수 없습니다. 청컨대 『후한서(後漢書)』 등 여러 사서를 간행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임금이 우부승지 김영견(金永堅)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무슨 주자(鑄字)를 써서 책을 인쇄하는가?”하자, 대답하기를, “갑인(세종 16, 1434)․을해(세조 1, 1455) 두 해에 주자(鑄字)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쇄는 경오자(庚午字)보다 좋은 것이 없었는데, 이용(李瑢)(안평대군)이 쓴 것이라 하여 이미 헐어 없애고, 강희안(姜希顔)에게 명하여 쓰게 해서 주자를 하였으니, 을해자((乙亥字))가 이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김영견에게 명하여 여러 사서(史書)를 인쇄해서 반포하게 하였다.(『성종실록』 권49, 성종 5년 11월 22일 계유)
성종 5년 11월 22일의 경연에서는 주자(鑄字)본 사서(史書)의 인출 문제가 논의되었다. 세종때 인출하지 못한 사서를 마저 인출하자는 동지사 이승소의 주장에 대해 성종은 당시 인쇄에 많이 사용하는 주자에 대해서 물었고, 우부승지 김영견은 갑인자와 을해자를 많이 쓰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강희안이 쓴 을해자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국왕은 김영견에게 여러 사서를 인쇄해서 반포하도록 지시하고 있는데, 이 사서 가운데 『고려사』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을해자본 『고려사』가 양성지의 건의에 의해 성종 13년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세종 24년에 완성하여 인쇄까지 마쳤으나 반포가 중지된 바 있는 권제(權踶)의 『고려사전문(高麗史全文)』의 인출 문제를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 남원군(南原君) 양성지가 상소하였다. “…1. 신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춘추관에 1건의 『고려사』가 있는데, 혹은 권초(權草), 혹은 홍의초(紅衣草), 혹은 전문(全文)이라 일컫습니다. 세종 무진년(세종 30, 1448)에 주자소(鑄字所)에 내려 인쇄하여 낼적에 신에게 명령하여 감수하고 교정하게 했습니다만, 인쇄를 마치자 세종께서 『고려사』를 편수한 것이 공정하지 못했음을 들으시고 반포하기를 정지하였으며, 붓을 들었던 사신(史臣)들도 이 때문에 죄를 얻었습니다. 무인년(세조 2, 1458)에 이르러 세조께서 사정전(思政殿)에 거둥하였을 적에 신이 권남(權擥)과 더불어 입시(入侍)하여서 직접 이 문제를 아뢰고 명을 받아 본고(本稿)를 개정하고서 권남과 신의 이름을 서명(署名)하였는데, 지금도 참고가 됩니다. 위의 『고려사』는 실지로는 『고려사대전(高麗史大全)』이었으며 착오된 곳을 이제 개정하였으니, 엎드려 바라건대 춘추관에 명령하여 본고를 찾아서 전교서(典校署)에 내려 보내 인쇄하여 반포하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성종실록』 권138, 성종 13년 2월 13일 임자)
○ 석강(夕講)에 나아갔다. 강(講)을 마치자, 이세좌(李世佐)․민사건(閔師騫)이 아뢰기를, “양성지가 상소하여 『고려전사(高麗全史)』 홍의초(紅衣草)를 간행하기를 주청하였는데, 해조(該曹)에서 간행하지 말도록 청합니다. 신이 그 서적을 보니 매우 상밀(詳密)하게 된 것이어서 간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서적이 어떠한가?”하였다. 송질(宋軼)이 대답하기를, “양성지는 신의 처조부(妻祖父)입니다. 양성지가 일찍이 신에게 말하기를, ‘세조께서 그 서적을 소중하게 여기어서 권남(權擥)에게 명령하여 양성지와 더불어 그 책을 간행하라고 하였다가 곧 다시 그 일을 정지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였습니다. 그 서적은 지금의 『고려사』와 비교하면 자못 자세하게 되었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서적을 가져다가 <궁내로> 들여라.” 하였다.(『성종실록』 권138, 성종 13년 2월 28일 정묘)
성종 13년 2월 13일, 양성지는 여러 항목으로 구성된 상소문을 올리면서, 춘추관에 보관 중인 『고려사전문』을 인쇄하여 반포할 것을 주장하였다. 권초․홍의초․전문으로 일컫고 있던 이 책은 세종 30년에 인쇄까지 마쳤으나 반포가 정지되었고, 세조 4년에 양성지 자신과 권남이 개정하여 간행할 계획이었으나 성사되지 못했는데, 이 때에 와서 다시 인쇄를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양성지의 인쇄 요청은 해당관청의 반대에 부딪쳤다. 양성지의 상소가 있은지 15일 뒤에 열린 경연에서 이세좌․민사건 등은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면서 『고려사전문』을 인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송질도 『고려사』보다 내용이 더 자세하다면서 인쇄 주장을 거들었다. 그러나 국왕은 이 서적을 궁내로 들이라는 명을 전하고 있을 뿐, 인쇄 여부를 답하지 않고 있다. 이 후에도 『고려사전문』이 인쇄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이렇게 볼 때, 『고려사』의 간행은 단종 즉위년 이후 소량 인출(印出)되어 내부(內府)에만 보관되어 오다가, 끊임없는 반포 요청에 따라 예종대 이후 이를 대량으로 인출하여 보급하였으며, 성종 5년 이후에는 활자본인 을해자본으로 인출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을해자본 이전에 인출된 『고려사』가 목판본인지 주자본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후 고려사 간행 기록이 확인되는 것은 광해군 2년(1610) 12월 11일의 일로, 이 때 국왕은 『고려사』를 즉시 내려보내 속히 정밀하게 인쇄한 다음 원본과 함께 올려보내는 일을 교서관에게 각별히 분부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현재 『고려사』 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목판본과 활자본(을해자본), 동아대학교 소장의 목판본, 연세대학교 동방학연구소에서 영인한 목판본, 아세아문화사에서 영인한 을해자본(乙亥字本) 등이 전해지고 있다. 규장각 소장의 『고려사』 판본은 모두 18종인데, 태백산본과 오대산본의 목판본 2종은 보사(補寫)된 부분이 없는 완질(完帙)이고, 기타 16종 가운데 2종 필사본으로 보사한 목판본 완질, 1종은 필사본으로 보사한 을해자본 완질, 1종은 필사본 완질이며, 나머지는 모두 영본(零本)이다. 동아대학교 소장의 목판본은 완질로, 중종대에 을해자본을 복각(復刻)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광철,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