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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사DB


개요

  • 한일관계사DB은 총 32책(연대표 3책)으로 구성된 원 사료를 한일관계사학회 회장 손승철 교수가 20년 동안 한글번역 작업 끝에 완성한 것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고 콘텐츠를 개발
  • 삼국시대부터 개항기에 이르는 한일관계 2천년의 관련 자료를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료별/연대순으로 집성하여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하면서 연구할 수 있도록 구성한 한일관계 연구의 필수 콘텐츠
  • 한일관계사DB는 2만여 건에 이르는 기사를 데이터베이스 구축한 것으로 시대/사료별 기사 검색, 인명/지명 색인을 제공하며, 원문 텍스트를 추가 제공함으로써 원문-한글번역-영인본의 상호 참조는 물론 원문을 쉽게 인용할 수 있도록 구축한 콘텐츠

온라인 DB 일러두기

  1. 경인문화사에서 출간한 『한일관계사료집성』 전책의 원문 이미지와 한글번역문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였습니다.
  2. 복수의 페이지에 걸쳐 수록된 원문이미지는 하나의 이미지로 합쳐서 등록하였습니다.
  3. 인명, 지명, 일반사항의 색인을 추가로 구축하여 검색에 반영하였습니다.

발간사

1. 시작하는 말

이 책은 한국사의 기본 사료인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한일관계기사 약 2만건을 발췌하여 그것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후, 해당되는 원문과 번역문을 편집하여 사료집 29권과 기사연표집 3권 등, 총 32권의 한일관계사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韓日關係記事’란 좁은 의미에서는 조선과 일본관계를 기록한 사료, 또는 일본의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일본에 직접 관계된 사료를 말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에 대하여 취한 정치 ․ 경제 ․ 군사 및 그 외의 여러 방면에 대한 시책이나 시행된 내용 등의 사료를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과 일본의 숙명적 관계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두 나라의 관계는 역사이래 그래왔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또한 미래에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쩌면 두 나라의 역사는 서로가 서로의 ‘關係’를 어떻게 정립하는 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보아도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韓日關係史’는 우리의 역사현실과 늘 밀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너무 외면되어 왔다. 더구나 과거 한일관계사의 연구가 주로 일본인에게서 시작되었고, 그것도 植民史學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목적의식에서 출발했던 만큼, 그 문제점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현시점이 동아시아속의 한국사, 나아가 세계사속의 한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지금, 그 전제가 되는 대외관계사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對外關係史를 특수사의 한 분야로 취급하는 시대 착오적인 인식이 팽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外政은 內政의 연장이며, 동시에 內政의 국제적 표현임을 상기할 때, 外政과 內政의 연구, 그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해서는 올바른 역사구성에 이르기가 어렵다. 이 점에서 ‘韓日關係史硏究’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새삼 강조할 것도 없다.

이 『한일관계사료집성』에 수록한 기사현황은『三國史記』 91건,『三國遺事』15건,『高麗史』687건,『高麗史節要』581건,『朝鮮王朝實錄』18,543건, 합계 19,543건이다. 이들 자료속의 기사는 하나 하나가 한일관계의 살아있는 기록이며, 과거 2천년간 한일관계의 현안이 무엇이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이들 기사에 대한 분석은 한일관계사의 흐름과 방향, 그리고 연구주제 내지는 문제의식을 개발하게 해주며, 또 연구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가야 하는 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물론 이들 기사들은 기존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상당히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 사료들에 대한 개별적인 분석은 물론이고, 체계적이며 정밀한 분석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이 사료집의 편찬은 연구자는 물론 한일관계에 일반인들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한일관계사 연구에 一助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2. 한일관계기사의 특징

그러면 이들 사료 가운데 특히 조선시대의 기사들을 왕대별 ․ 시기별로 정리․분석하여, 사료적 중요성과 특성을 개관해 보자.

이 『韓日關係史料集成』에 수록된 조선시대 기사는 총 18,169건으로 조선전기인 태조부터 명종(1392~1567)까지가 9,197건, 선조대(1567~1608)가 7,501건, 조선후기인 광해군부터 철종(1608~1863)까지가 1,471건이다. 물론 이 통계가 절대적인 수치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발췌자의 관점이나 문제의식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有井智德씨는 조선전기에 9,208건, 선조대에 4,795건, 합계 14,003건(유구관련기사 257건은 별도 분류) 제시하고 있으나, 본인이 발췌하여 정리한 사료수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왕대별 사료수 일람표
왕대 연대 재위 기사수 연평균
태조 1398 6 221 37
정종 1399~1400 2 39 20
태종 1401~1418 18 614 34
세종 1418~1450 32 2,143 67
문종 1450~1452 2 182 91
단종 1452~1455 3 225 75
세조 1455~1468 13 754 58
예종 1468~1469 1 51 51
성종 1469~1494 25 1,943 78
연산군 1494~1506 12 412 34
중중 1506~1544 39 1,914 49
인조 1545 1 12 12
명종 1546~1567 22 687 31
합계 1392~1567 176 9,197 52
선조 1567~1608 41 7,501 183
광해군 1608~1622 14 301 22
인조 1623~1649 27 274 10
효종 1649~1659 10 66 7
현종 1659~1674 15 134 9
숙종 1674~1720 46 271 6
경종 1720~1724 4 6 2
영조 1724~1776 52 155 3
정조 1776~1800 24 132 6
순조 1801~1834 34 112 3
헌종 1835~1848 13 15 1
철종 1848~1863 15 5 0.3
1608~1863 255 1,471 6
총계 1392~1863 472 18,169 59

1) 조선전기

조선전기 기사에 관해서는 有井智德에 의해 이미 태조부터 선조대까지를 분석한 논문이 있다(『李朝實錄』の日本關係史料の硏究』, 1993). 그런데 그는 사료의 내용을 종류별 ․ 연도별로 나누어, 그것이 연도에 따라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가를 살폈다. 그리고 각왕대별 일본관계기사의 내용(종류별로 나눈 사료의 수와 그 변화, 왕대별 사료의 특색 등)에 대하여 개관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조선전기 한일관계사의 성격을 규명하려 했다.

그 결과 건국초부터 태종중기까지를 왜구대책을 중심으로 한 시기, 태종중기이후 성종초기에 이르는 왜인에 대한 통교무역체제가 완성기, 이후 통교무역체제의 모순이 자주 나타나지는 1591년까지의 시기, 그리고 양국의 선린체제가 일거에 붕괴되는 1592년 이후의 임진왜란기로 시기를 나누고 있다. 또한 조선전기(1392~1608) 태조때부터 선조때까지 왜구 침구 사료는 312건인데 비해 그에 대한 대책사료는 6,546건으로, 이를 통해 조선이 어떻게 왜구대책에 노력했던 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된 사절은 2,369건인데,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은 71건으로, 이 숫자를 통해 양국관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본인이 태조대부터 선조대까지 발췌한 사료 수는 총 16,698건으로 선조대의 7,501건을 제외한 명종대까지의 기사 수는 총 9,197건으로 현황을 소개하면 다음 표와 같다.

우선 본인은 조선전기(태조~명종) 전체를 11개 항목(왜구침략, 응징대책, 포상처벌, 조선견사, 일본견사, 조선피로인, 중국피로인, 항왜, 통교무역체제, 유구, 기타)로 분류하였다. 특히 대왜효자 ․ 순순 ․ 절부를 포상과 처벌로 분류했고, 유구를 포함시켰다.

앞서 필자가 분류한 방식에 의해서 조선전기 한일관계의 특징을 개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왜구의 침입에 관해서 보면 태조부터 세종까지는 성행하고 있으나, 문종이

태조~명종대 기사일람표
왕명 연도 왜구
침략
응징
대책
포상
처벌
조선
견사
일본
견사
조선
피로인
중국
피로인
항왜 통교
무역체제
유구 기타
태 조 1392~1398 34 50 36 6 19 7 3 29 3 9 25 221
정 종 1399~1400 5 4 1 1 11 1 1 8   1 6 39
태 종 1401~1418 43 74 41 18 296 21 17 40 13 9 42 614
세 종 1418~1450 24 414 144 200 721 13 58 82 217 48 221 2,142
문 종 1450~1452 1 60 10 1 52     4 16 4 34 182
단 종 1452~1455   35 5   118     1 6 6 54 225
세 조 1455~1468 1 83 19 1 315   3 31 23 70 209 754
예 종 1468~1469   1     29     3 4 1 13 51
성 종 1469~1494 56 380 39 14 756   1 44 173 86 394 1,943
연산군 1494~1506 12 74 26   138       15 17 130 412
중 종 1506~1544 44 898 96   55       222 58 541 1,914
인 종 1545   4     1       4   3 12
명 종 1546~1567 17 382 29   13         5 241 687
  237 2,459 446 241 2,524 42 83 242 696 314 1,913 9,197

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태조이래 조선왕조의 응징과 교린정책이 성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건국직후부터 왜구의 금압과 피로인의 송환을 위해 중앙의 막부정권 및 지방의 중소영주들과 외교교섭을 전개하면서, 왜구를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이 취한 정책으로는 도항지의 제한, 즉 포소와 왜관제도, 도항자를 제한하기 위한 行狀 ․ 圖書 ․ 書契 ․ 文引, 근해에서 어로행위를 하는 왜인을 통제하기 위한 釣魚 ․ 收稅規定, 사송왜인을 통제하기 위한 上京路나 接待規定 등이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규정을 제도화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의 모든 통교자를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기미질서에 편입시켜갔고, 1443년 癸亥約條를 통하여 여러 제도를 가시적으로 완성하였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성종대에 들어와 1478년 이후 1494년 사이에는 대마도 및 삼포항거왜인의 어업에 대한 금약이 해이해져 왜구가 매년 발생했고, 그에 대한 응징 및 대책사료도 증가한다. 그 후 중종대에는 양국간에 누적된 문제에 의해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났고, 1512년 임신약조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양국관계는 다시 1544년 사량진왜변을 유발시켰고, 1547년 정미약조에 의해 다시 수습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정미약조에 의해 불이익을 받은 대마도는 세견선 증가를 비롯한 종래의 권익을 되찾기 위해 더욱 많은 僞使를 파견하여 제권익의 부활공작을 계속했고, 결국 명종 말년에 이르면 종래의 권익을 거의 보장받게 된다. 최근 위사에 관련된 연구가 새로운 관심사가 되고 있는데, 앞으로 조선전기 僞使問題의 규명은 조선전기 한일관계사의 중요한 연구테마가 될 것이다.

다음 선조시대의 7,501건의 기사는 임진왜란 때문에 사료의 발췌도 기본적으로 한일관계나 일본관련 기사는 물론이고, 임진왜란의 전황을 피악하는데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기사를 포함시켰다. 아직 기사내용을 분류중에 있지만, 임진왜란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침략과 그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사료가 발췌되어야 하고, 분류항목이 정해져야 한다. 따라서 일본군의 침입과 그에 대한 대책, 응전상황, 국왕의 이동이나 동태, 명군관계, 의병관계, 조선의 피해, 강화교섭(통신사파견이나 전쟁중의 강화교섭, 임란직후부터의 강화교섭, 탐적사 및 회답사의 파견과정)등 선조대의 한일관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기사는 모두 발췌했다.

2) 조선후기

조선후기의 경우, 1608년 광해군대부터 1863년 철종대까지 255년간 1,471건의 기사가 수록되었다. 이를 내용별로 분석해 보면 다음표와 같다.

조선후기의 기사일람표
왕대별 년 도 왜란
관계
포상
관계
일본
정세
일본
대비
조선
견사
일본
견사
왜관
무역
외교
의례
표류 중국
관계
류구
관계
기타
광해군 1608~1622 18 48 8 28 21 8 52 33 1 49 22 13 301
인 조 1623~1649 24 17 31 24 17 18 32 33 19 31 9 19 274
효 종 1649~1659 1 3 8 5 6 4 11 9 4 6 1 8 66
현 종 1659~1674 2 14 1 2   2 62 4 16 1 6 24 134
숙 종 1674~1720 11 22 14 21 13 6 59 49 9 10 4 50 271
경 종 1720~1724 1     1   1 1 2         6
영 조 1724~1776 12 27 7 15 6   24 26 6 4 1 27 155
정 조 1776~1800 3 21 4 10 2 3 13 12 14 7 27 16 132
순 조 1801~1834 1 25 7 1 4 9 7 31     6 21 112
헌 종 1835~1848   1     1   1 4 1 1 1 5 15
철 종 1848~1863             1         4 5
1608~1863 73 178 80 107 70 51 263 203 701 109 80 187 1471

조선후기 256년간 기사가 가장 많았던 왕대는 광해군대이고, 다음이 인조 ․ 숙종 ․ 영조 ․ 정조의 순이며, 가장 적은 왕대는 철종 ․ 경종 ․ 헌종이다. 물론 기사의 많고 적음은 재위기간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는 일람표에서 알 수 있듯이 임란직후가 가장 많았고, 개항 직전인 19세기 중반에 가장 적었다. 임란직후에 기사가 많은 것은 임란후 전쟁의 후유증과 뒤처리 및 단절된 한일관계를 재개하는데 따른 여러 가지 문제, 그리고 명 ․ 청교체시기의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만, 19세기 중반기에 적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한편 내용별로 특징을 보면, 첫째, 외교의례에 관한 기사가 제일 많다. 이것은 조선후기 한일관계가 기본적으로는 양국의 국가적인 통제하에 각종의 외교적인 틀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상호간에 많은 사절왕래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사가 많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조선에서는 12회에 걸쳐 막부 장군에게 사신(回答兼刷還使 3회, 通信使 9회)을 파견했고, 대마도주에게는 54회에 問慰行을 파견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대마도가 매년 정기적으로 八送使를 파견하고 부정기적으로 大差倭․小差倭를 수시로 파견했음을 고려하면, 양국사이의 외교관계가 얼마만큼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임란때의 전공자 및 殉節 ․ 孝子 ․ 殉孫들에 대한 논공행상 및 포상기사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세와 대비에 관한 내용도 상당한 숫자임을 볼 때, 조선왕조의 일본인식은 기본적으로 적대감과 경계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倭館關係 기사인데, 이것은 1609년 己酉約條이후 양국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왜관에 일본인의 거주가 허용되자, 이들 간에는 물론 조선인들과 각종의 마찰이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잠상과 밀매에 관한 사건도 적지 않게 등장하는 등 왜관을 무대로 하는 많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넷째, 중국과 유구에 관한 기사도 많다. 이들 기사들은 조선과의 개별관계가 아니라, 모두 일본에 관련된 기사들이다. 예를 들면 중국관계의 경우 광해군 ․ 인조대에는 후금과 청에 관한 기사가 많은데, 중국에서의 정세변동이나 조선침략 기사 등에 관한 조일양국의 정보교환 기사가 많다. 한편 유구관계 기사도 많은데 1609년 유구가 薩摩州의 침공에 의해 일본에 복속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의 교류가 북경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시대 한일관계의 연구가 단순히 조선과 일본만의 관계차원에서 다루어서는 안되며,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폭넓게 분석되어져야 한다. 그 외 漂流에 관한 기사가 있고, 기타로 분류된 항목에서는 다양한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가 많아, 이를 통해 조일관계의 여러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볼 때, 조선후기 한일관계의 가장 큰 현안은 역시 임진왜란이후 전쟁의 후유증과 뒤처리 문제,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의식, 단절된 통교관계의 회복, 왜관의 운영문제였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한일관계가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일원적인 관계가 아니라 중국과 유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3) 유구관계

『朝鮮王朝實錄』에는 1392년부터 1840년까지 총 437건의 유구관계 사료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사료의 내용을 보아도 조 ․ 유관계의 모든 부분을 망라하고 있어서 조유관계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유구 관계사료의 내용을 종류별과 연대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유구관계 기사일람표
왕대 유구
사신옴
조선
사신감
조회 접대 위사
관련
피로인 표류민 무역 유구
사정
일본
관련
중국
관련
불경
청구
기타
유구 조선
태조(1392~1398) 4   2     2             1 9
정종(1398~1400) 1                           1
태종(1400~1418) 2 1       3           1   2 9
세종(1418~1450) 5 2 6 2 3 2 6 1 2 1 3 1   14 48
문종(1450~1452)     1                     3 4
단종(1452~1455) 1       2 1   1   1         6
세조(1455~1468) 15   8 13 8 2 2 2 1 2 7   4 6 70
예종(1468~1469)                           1 1
성종(1469~1494) 13   1 33     3 5   7 3 5 16 86
연산(1494~1506) 2     2 1   4   1   1 2 1 3 17
중종(1506~1544) 3     1 2   18 11 1   2 16   4 58
명종(1545~1567)               1   1 2 1     5
선조(1567~1608)             3       18 17   5 43
광해(1608~1623)             7       3 4   8 22
인조(1623~1649)             3       1 1   4 9
효종(1649~1659)                     1       1
현종(1659~1674)               6             6
숙종(1674~1720)               2     1 3   1 7
영조(1724~1776)               1             1
정조(1776~1800)             10         14   3 27
순조(1800~1834)             6               6
헌종(1834~1849)                           1 1
총 계 46 3 18 51 16 10 59 28 10 5 46 63 10 72 437

위 표를 통하여 『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유구 관계사료의 특징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과 유구가 국가간의 공식적인 교류는 주로 조선전기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후기에는 표류민 송환이나 중국 또는 일본에 관련된 사료가 대부분이다. 둘째, 조 ․ 유간의 사신왕래는 주로 유구에서 조선에 온 사신이 대부분이고, 조선에서는 단지 2번만 사신이 파견되었다. 셋째, 유구에서 조선에 온 사신들은 거의 상경하여 조선국왕을 알현했으며, 조선에서는 이들은 상국의 입장에서 후한 접대를 행했다. 넷째, 조선측의 유구사신에 대한 우대는 위사의 발생을 초래했고, 이들은 경제적인 이익이나 불경청구를 목적으로 왕래했다. 다섯째, 조선초기 조류관계는 피로인 쇄환을 명분으로 시작되며, 중 ․ 후기에는 양국의 표류민 송환의 명분으로 바뀌어 진다. 여섯째, 양국교류의 경제적인 측면을 보면 유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무역이며, 조선은 유구를 통하여 동남아산 물자를 수입하고, 유구는 동남아산 물자의 중계역할을 행했다. 일곱째, 조선은 사신이나 표류민을 통하여 유구사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구의 정황이나 지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여덟째, 조선과 유구의 교류가 제일 빈번했던 시기는 15세기 중반부터 1세기간이며, 조선중기인 양란을 전후해서는 일본의 정세를 자세히 알려오고 있으며, 조선후기에는 주로 중국을 통해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홉째, 조선은 유구이외에도 동남아의 久邊國이나 爪蛙國과도 여러 차례에 걸쳐 교류를 행하고 있다.

3. 맺음말

이상에서 이 사료집성에 수록된 기사를『朝鮮王朝實錄』중의 기사를 중심으로 대체적인 개황을 살펴보았다. 이 내용을 통해 한일관계 기사의 특징을 보건데, 조선전기의 경우 왜구의 침략과 응징 및 대책 그리고 그에 관계된 포상 처벌이 가장 많았다. 이는 결국 조선전기 대일관계의 기조는 왜구에 관한 사항이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朝鮮遣使와 日本遣使 등 사절왕래였는데, 이는 조 ․ 일 양국이 모두 현안문제를 외교적인 방법에 의해 풀어간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사절파견에 있어서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두 가지 항목의 특징을 분석하여 有井智德은 ‘조선전기의 日朝關係는 결코 평등 ․ 호혜의 관계는 아니었고, 일본(일본전체는 아니지만)은 조선에 대하여 침략적이었다는 점과 일본은 통교무역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이익을 받았다는, 말하자면 일본은 受益者였고, 조선은 利益을 준 입장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쨌든 조선의 입장에서, 전기의 현안은 어떻게 하면 倭寇를 通交者로 전환시켜 가는가가 가장 큰 문제였고, 선조대에는 일본의 침략과 대응, 후기의 경우는 전쟁에 의해 붕괴된 교린관계를 재확립하고, 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유지해 간다는 외교적인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나아가 對日政策의 기본 틀은 중국과 유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속에서 交隣體制를 유지해 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 각 왕대별 기사나 임진왜란에 관한 기사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물론 발췌자의 문제의식이나 관점에 따라 분류방식이나 분석이 달라지는 만큼, 그렇게 간단한 작업은 아니겠지만, 향후 이 자료집성에 의해 보다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그만큼 다양한 한일관계사의 해석과 전망을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다음 이들 사료를 『史料集』으로 편찬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해 보자.

『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일본관계기사를 사료집으로 편찬하는 작업은 이미 1967년에 田村洋幸에 의하여 『日朝關係編年史料』(태조~태종)가 발간된 바 있고, 1970년대 초부터는 東京敎育大學 東洋史學敎室 관계자를 중심으로 「중국 ․ 한국의 사적에 있는 日本史料編纂會」가 결성되어 중국 및 한국사료에 대한 편찬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삼국․고려에 대한 편찬은 이미 완료(권1)되었고, 조선시대는 방대한 양 때문에 2002년 현재『宣祖實錄』제65권(1595년도)까지 『日本史料集成』 12권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중단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 이유는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고령화되어 세상을 떠났기때문이라 한다. 아쉬웁게도 『日本史料集成』은 『朝鮮王朝實錄』에서 사료를 발췌하여 활자본으로 재출판하였기 때문에, 발췌과정에서 누락이 있을 수 있었고, 또 활자본에 오자나 탈자가 있는 경우가 상당히 발견되었다.

이 사료집성은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발췌․복사하여 영인하고, 원문과 함께 한글 번역문을 첨부하여 29권으로 편집하였다. 그리고 전체기사 내용을 六何原則(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에 의해 재작성하여 3권의 기사연표집을 편찬하여 총 32권으로 구성하였다. 앞으로 이 사료집과 연표집을 DB로 구축하여 검색이 가능하도록 CD—ROM도 제작하여 20년전의 꿈을 이루어 볼 생각이다.

한편 임진왜란 전공자인 北島万次씨도 개별적으로 『壬辰倭亂 史料集』을 작성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외에도 항목별로 사료를 정리한 것으로 村井章介 ․ 荒野泰典 ․ 高橋公明 ․ 孫承喆의 『倭館關係記事集』, 關周一의 『被擄 ․ 漂流人年表集』, 池內敏의 『漂流民年表集』 등이 있다.

발간후기

한일관계사에 학문적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75년 해병대 제대 후, 성균관대학에 복학을 하여, 白鍾基선생님의 연구실에 들어가면서부터이다. 개항기 이후의 한일관계사를 연구하시던 선생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에게 交隣關係로 상징되는 조선시대 한일관계사를 말씀하셨고, 평생 그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일찍 유명을 달리하신 선생님께 송구스러울 뿐이다.

사료집의 중요성은 역사학도라면 누구에게나 새삼 강조할 것도 없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이 사료집이 완성되기까지 많은 사연이 있었다. 또 여러분들의 도움 덕분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의미에서 그간의 사정을 간단히나마 후기로 남기고 싶다.

내가 한일관계 사료의 체계적인 정리를 생각한 것은 복사기가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 초반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원전에서 사료를 발췌한 후, 그것을 복사하여 카드에 오려 붙이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그러던중 1985년 북해도대학에 연구원으로 1년간 유학할 때부터 컴퓨터를 접하게 되었다. 북해도대학 일본사연구실에서 컴퓨터의 위력을 실감한 나는 귀국후, 곧바로 발효공학과 천병익교수를 앞세워 청계천 전자상가를 찾았다. 그곳에서 조립식 컴퓨터를 구입했고, 독문과 김인수교수의 도움을 받아 컴퓨터를 이용해서 한일관계사 사료의 DB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의 한글은 보석글의 시대였고, 반각의 각주를 다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한자도 제대로 입력되지 않던 단계였다. 그때 천교수는 Rapide화일을 이용하여 한글입력용 DB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었고, 김인수교수는 행망용 한자를 입력할 수 있는 프로그램(KIMS.exe)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김교수는 거의 6개월간이나 컴퓨터학원에 다니면서 컴퓨터언어를 공부하여 독자적인 KIMS.exe를 개발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프로그래머다. 당시 춘천 후평동 팔호광장에 25시라는 호프집이 있었는데, 정말 25시가 되도록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사료의 DB化에 대해 열심히 토론하면서 방법을 찾아갔다. 하지만 1989년 여름, 불의의 교통사고에 의해 사료정리작업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사료정리작업은 1992년 동경대학 사료편찬소에 유학을 하면서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사료편찬소의 서고에서『日本史料集成』을 본 순간, 내가 계획했던 작업이 이미 일본에서 상당히 진행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허무했다. 지난 6년간 힘겹게 정리한 자료를 일본까지 가져가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벌써 사료집으로 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활자본으로 말이다. 한동안 의욕을 상실했다. 그러나 사료집을 꼼꼼히 살펴가는 동안, 활자본이 지닌 한계, 즉 많지는 않지만 오자와 탈자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는 다시 용기를 얻었다. 내 경우는 사료집에 원문을 영인해서 그대로 제시하고, 한글 번역을 덧붙여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마침 1993년말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위원회에서『국역본 조선왕조실록』이 완간되었기 때문에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발췌한 사료의 양이 너무 많아, 간단히 파악이 안되므로, 모든 사료내용을 각 기사별로 육하원칙에 의해 재작성하여 기사연표집을 만들고, 차후에 컴퓨터를 이용해서 DB化해서 검색을 가능하게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우연치 않게 1996년 일본 「住友財團」 으로부터 ‘日韓關係2000年歷史年表’라는 연구주제로 70만엔의 연구비를 받게 되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7년간이란 어두운 터널을 뚫고, 강원대학교로 다시 돌아오면서 사료의 발췌, 정리, 번역윤문, 기사작성 작업이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1997년부터는 학생들로 팀을 짜서 체계적으로 역할분담을 하면서 작업을 시작했다. 원문을 복사해서 오리고 붙이고, 번역문을 윤문하는 일을 1년쯤 했다. 그리고 1999년 장득진연구관의 도움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연구지원금을 받으면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발췌된 사료를 각 기사별로 년표색인을 작성하여 대조하는 과정에서 기사내용들이 중간 중간 누락된 사실을 발견하면서, 기존의 작업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비운을 맞았다. 학생들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이미 연구비는 바닥이 들어났고, 은행의 마이너스 통장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결국 이 거대한 작업을 개인이 시도했다는 무모함을 자책하면서, 그동안 작업했던 것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료정리작업이 이미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버려, 도저히 그대로 포기할 수가 없었다. 몇 달을 허탈감속에 보내면서 여기 저기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 다행히 한국학 관련 K출판사 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작업비용을 인세조로 미리 지급할터니 한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래서 2001년 5월부터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출판경기의 불황으로 1년만에 작업은 다시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2002년 5월 역사학대회가 끝난 후, 이상배 ․ 김세민 선생과 함께 경인문화사의 한정희사장을 만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만에 드디어 지난 20년간 계속해왔던『韓日關係史料集成』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참으로 길고 험한 여로였다.

그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비록 허사가 되었지만 96년부터 아르바이트작업에 참여했던 사학과 제자들이 있다. 최종일을 비롯하여 서교진 ․ 김주창 ․ 이지선, 원주 희자매인 민희 ․ 은희 ․ 또 은희, 김애정 ․ 김은미 님 등이다. 그리고 2001년이후 3년간이나 오리기, 붙이기를 계속해 온 한성주 ․ 정지연 ․ 風間千秋님, 그 외에도 몇 명이 더 있는데, 기억이 가물거린다. 미안하고 고마운 제자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교정작업에 참여해 준 유재춘교수 ․ 김성근 ․ 이흥권 ․ 황은영님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아직도 자식 걱정만 하시는 부모님, 섬세한 아내 김선옥, 초등학교 이후 20년간이나 이 작업을 지켜 본 아들 민규, 작업을 격려하며 수없이 건배를 외쳐 주시던 이진무 처이모부님, 이제는 한식구가 된 山里澄江先生 나에게 이런 사랑이 없었다면 이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을 것이다.

끝으로 뭐니 뭐니해도 제일 감사한 사람은 한정희사장을 비롯한 신출내기 이미진, 신학태팀장 등 경인문화사의 식구들이다. 사료집성의 계획을 처음 제안했을 때, 선뜻 응하면서 몫돈으로 그동안의 적자를 메꾸어주고, 또 지난 2년간의 작업비용을 매달 월급 주듯이 하루도 늦추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 한상하 회장님의 뜻을 한치도 거역하지 않는 한국학 출판계의 거목이다. 정말로 이 사료집성이 경인문화사에서 햇볕을 보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사료집성의 출간을 기다리며 철학과 南相鎬교수가 시 한수를 보내왔다.

係史和隣계사화린
朝鮮王朝五百年조선왕조 오백년
實錄藏存爲備忘실록에 기록함은 잊지 않기 위함이라
韓日近隣遺史籍한국과 일본, 이웃관계에 많은 기록을 남겼으니
孫生整理立條綱손 선생이 정리하여 체계를 세웠구나

讀字取章二十載한 글자 한 문장 정리하길 이십년
風辛霜苦不能妨신고풍상도 방해하지 못했구나
血墨心筆三十卷심혈을 기울여 삼십권으로 정리했으니
傳代承孫守史疆자손만대 이어가며 역사강토 지키리

분에 넘치는 찬사이다. 그리고 성대 사학과 동창생 虹隱 曹玄明은 30년 우정을 圖書에 새겨 보냈다. 이 친구들의 기대처럼『韓日關係史料集成』이 ‘한일관계사연구’의 새 지평을 열어가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일러두기

  1. 이 사료집성에 수록된 「韓日關係史料」란 좁은 의미에서는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기록한 기사, 또는 일본의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일본에 직접 관계된 기사를 말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에 대하여 취한 여러 방면의 시책이나 시행된 내용까지 포함하였다.
  2. 이 사료집성의 원문은 『三國史記』(경인문화사, 1970), 『三國遺事』(명문당, 1986), 『高麗史』(아세아문화사, 1973), 『高麗史節要』(아세아문화사, 1973), 『朝鮮王朝實錄』(국사편찬위원회, 探求堂影印, 1970)에서 기사를 발췌․복사하였고, 번역문은 서울시스템(주)에서 제작한 『韓國歷史五千年 CD-ROM』(2001)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위원회의 『국역본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완성하였다.
  3. 조선시대 선조대의 임진왜란 기사는 일본과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전쟁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모두 포함하였다.
  4. 연월일의 표시를 위하여, 연도는 좌우에 일괄적으로 廟號와 西曆을 썼고, 월일은 『韓國年曆大典』(韓甫植, 영남대출판부, 1987)를 참조하여 작성하고, 원본의 간지를 넣었다.
  5. 번역본에 고유명사(人名, 地名, 官職名 등)는 모두 괄호안에 한자를 넣어주었고, 현대어로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용어도 한자를 넣어주었다.
  6. 용어의 설명이 필요한 경우는 좌우에 주(*)를 달았다.
  7. 모든 기사의 번역문 끝부분에는 원사료의 권수와 쪽수를 표시하였다.
  8. 수록된 모든 기사는 책의 앞부분에 번호와 목차를 넣어주어 기사의 내용을 쉽게 열람할 수 있게 하였다.
  9. 번역문은 앞부분에, 원문은 뒷부분에 수록하고, 왕대별로 일련번호를 붙여 쉽게 원문을 찾아 비교할 수 있게 하였다.
  10. 풀이를 의미하는 한자는 [ ]로 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