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는 말
이 책은 한국사의 기본 사료인 『三國史記』 『三國遺事』 『高麗史』 『高麗史節要』 『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한일관계기사 약 2만건을 발췌하여 그것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후, 해당되는 원문과 번역문을 편집하여 사료집 29권과 기사연표집 3권 등, 총 32권의 한일관계사료를 집대성한 것이다.
‘韓日關係記事’란 좁은 의미에서는 조선과 일본관계를 기록한 사료, 또는 일본의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일본에 직접 관계된 사료를 말하며, 넓은 의미에서는 조선에서 일본에 대하여 취한 정치 ․ 경제 ․ 군사 및 그 외의 여러 방면에 대한 시책이나 시행된 내용 등의 사료를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한국과 일본의 숙명적 관계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두 나라의 관계는 역사이래 그래왔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또한 미래에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쩌면 두 나라의 역사는 서로가 서로의 ‘關係’를 어떻게 정립하는 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보아도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韓日關係史’는 우리의 역사현실과 늘 밀착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너무 외면되어 왔다. 더구나 과거 한일관계사의 연구가 주로 일본인에게서 시작되었고, 그것도 植民史學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된 목적의식에서 출발했던 만큼, 그 문제점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현시점이 동아시아속의 한국사, 나아가 세계사속의 한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지금, 그 전제가 되는 대외관계사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對外關係史를 특수사의 한 분야로 취급하는 시대 착오적인 인식이 팽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外政은 內政의 연장이며, 동시에 內政의 국제적 표현임을 상기할 때, 外政과 內政의 연구, 그 어느 한쪽도 소홀히 해서는 올바른 역사구성에 이르기가 어렵다. 이 점에서 ‘韓日關係史硏究’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새삼 강조할 것도 없다.
이 『한일관계사료집성』에 수록한 기사현황은『三國史記』 91건,『三國遺事』15건,『高麗史』687건,『高麗史節要』581건,『朝鮮王朝實錄』18,543건, 합계 19,543건이다. 이들 자료속의 기사는 하나 하나가 한일관계의 살아있는 기록이며, 과거 2천년간 한일관계의 현안이 무엇이었던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이들 기사에 대한 분석은 한일관계사의 흐름과 방향, 그리고 연구주제 내지는 문제의식을 개발하게 해주며, 또 연구가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가야 하는 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물론 이들 기사들은 기존의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상당히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 사료들에 대한 개별적인 분석은 물론이고, 체계적이며 정밀한 분석이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이 사료집의 편찬은 연구자는 물론 한일관계에 일반인들도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한일관계사 연구에 一助가 되어주기를 기대한다.
2. 한일관계기사의 특징
그러면 이들 사료 가운데 특히 조선시대의 기사들을 왕대별 ․ 시기별로 정리․분석하여, 사료적 중요성과 특성을 개관해 보자.
이 『韓日關係史料集成』에 수록된 조선시대 기사는 총 18,169건으로 조선전기인 태조부터 명종(1392~1567)까지가 9,197건, 선조대(1567~1608)가 7,501건, 조선후기인 광해군부터 철종(1608~1863)까지가 1,471건이다. 물론 이 통계가 절대적인 수치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발췌자의 관점이나 문제의식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有井智德씨는 조선전기에 9,208건, 선조대에 4,795건, 합계 14,003건(유구관련기사 257건은 별도 분류) 제시하고 있으나, 본인이 발췌하여 정리한 사료수를 도표화하면 다음과 같다.
왕대 | 연대 | 재위 | 기사수 | 연평균 |
태조 | 1398 | 6 | 221 | 37 |
정종 | 1399~1400 | 2 | 39 | 20 |
태종 | 1401~1418 | 18 | 614 | 34 |
세종 | 1418~1450 | 32 | 2,143 | 67 |
문종 | 1450~1452 | 2 | 182 | 91 |
단종 | 1452~1455 | 3 | 225 | 75 |
세조 | 1455~1468 | 13 | 754 | 58 |
예종 | 1468~1469 | 1 | 51 | 51 |
성종 | 1469~1494 | 25 | 1,943 | 78 |
연산군 | 1494~1506 | 12 | 412 | 34 |
중중 | 1506~1544 | 39 | 1,914 | 49 |
인조 | 1545 | 1 | 12 | 12 |
명종 | 1546~1567 | 22 | 687 | 31 |
합계 | 1392~1567 | 176 | 9,197 | 52 |
선조 | 1567~1608 | 41 | 7,501 | 183 |
광해군 | 1608~1622 | 14 | 301 | 22 |
인조 | 1623~1649 | 27 | 274 | 10 |
효종 | 1649~1659 | 10 | 66 | 7 |
현종 | 1659~1674 | 15 | 134 | 9 |
숙종 | 1674~1720 | 46 | 271 | 6 |
경종 | 1720~1724 | 4 | 6 | 2 |
영조 | 1724~1776 | 52 | 155 | 3 |
정조 | 1776~1800 | 24 | 132 | 6 |
순조 | 1801~1834 | 34 | 112 | 3 |
헌종 | 1835~1848 | 13 | 15 | 1 |
철종 | 1848~1863 | 15 | 5 | 0.3 |
계 | 1608~1863 | 255 | 1,471 | 6 |
총계 | 1392~1863 | 472 | 18,169 | 59 |
1) 조선전기
조선전기 기사에 관해서는 有井智德에 의해 이미 태조부터 선조대까지를 분석한 논문이 있다(『李朝實錄』の日本關係史料の硏究』, 1993). 그런데 그는 사료의 내용을 종류별 ․ 연도별로 나누어, 그것이 연도에 따라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가를 살폈다. 그리고 각왕대별 일본관계기사의 내용(종류별로 나눈 사료의 수와 그 변화, 왕대별 사료의 특색 등)에 대하여 개관하고, 그것에 기초해서 조선전기 한일관계사의 성격을 규명하려 했다.
그 결과 건국초부터 태종중기까지를 왜구대책을 중심으로 한 시기, 태종중기이후 성종초기에 이르는 왜인에 대한 통교무역체제가 완성기, 이후 통교무역체제의 모순이 자주 나타나지는 1591년까지의 시기, 그리고 양국의 선린체제가 일거에 붕괴되는 1592년 이후의 임진왜란기로 시기를 나누고 있다. 또한 조선전기(1392~1608) 태조때부터 선조때까지 왜구 침구 사료는 312건인데 비해 그에 대한 대책사료는 6,546건으로, 이를 통해 조선이 어떻게 왜구대책에 노력했던 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나아가 일본에서 조선에 파견된 사절은 2,369건인데,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은 71건으로, 이 숫자를 통해 양국관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본인이 태조대부터 선조대까지 발췌한 사료 수는 총 16,698건으로 선조대의 7,501건을 제외한 명종대까지의 기사 수는 총 9,197건으로 현황을 소개하면 다음 표와 같다.
우선 본인은 조선전기(태조~명종) 전체를 11개 항목(왜구침략, 응징대책, 포상처벌, 조선견사, 일본견사, 조선피로인, 중국피로인, 항왜, 통교무역체제, 유구, 기타)로 분류하였다. 특히 대왜효자 ․ 순순 ․ 절부를 포상과 처벌로 분류했고, 유구를 포함시켰다.
앞서 필자가 분류한 방식에 의해서 조선전기 한일관계의 특징을 개관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왜구의 침입에 관해서 보면 태조부터 세종까지는 성행하고 있으나, 문종이
왕명 | 연도 | 왜구 침략 |
응징 대책 |
포상 처벌 |
조선 견사 |
일본 견사 |
조선 피로인 |
중국 피로인 |
항왜 | 통교 무역체제 |
유구 | 기타 | 계 |
태 조 | 1392~1398 | 34 | 50 | 36 | 6 | 19 | 7 | 3 | 29 | 3 | 9 | 25 | 221 |
정 종 | 1399~1400 | 5 | 4 | 1 | 1 | 11 | 1 | 1 | 8 | 1 | 6 | 39 | |
태 종 | 1401~1418 | 43 | 74 | 41 | 18 | 296 | 21 | 17 | 40 | 13 | 9 | 42 | 614 |
세 종 | 1418~1450 | 24 | 414 | 144 | 200 | 721 | 13 | 58 | 82 | 217 | 48 | 221 | 2,142 |
문 종 | 1450~1452 | 1 | 60 | 10 | 1 | 52 | 4 | 16 | 4 | 34 | 182 | ||
단 종 | 1452~1455 | 35 | 5 | 118 | 1 | 6 | 6 | 54 | 225 | ||||
세 조 | 1455~1468 | 1 | 83 | 19 | 1 | 315 | 3 | 31 | 23 | 70 | 209 | 754 | |
예 종 | 1468~1469 | 1 | 29 | 3 | 4 | 1 | 13 | 51 | |||||
성 종 | 1469~1494 | 56 | 380 | 39 | 14 | 756 | 1 | 44 | 173 | 86 | 394 | 1,943 | |
연산군 | 1494~1506 | 12 | 74 | 26 | 138 | 15 | 17 | 130 | 412 | ||||
중 종 | 1506~1544 | 44 | 898 | 96 | 55 | 222 | 58 | 541 | 1,914 | ||||
인 종 | 1545 | 4 | 1 | 4 | 3 | 12 | |||||||
명 종 | 1546~1567 | 17 | 382 | 29 | 13 | 5 | 241 | 687 | |||||
계 | 237 | 2,459 | 446 | 241 | 2,524 | 42 | 83 | 242 | 696 | 314 | 1,913 | 9,197 |
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태조이래 조선왕조의 응징과 교린정책이 성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은 건국직후부터 왜구의 금압과 피로인의 송환을 위해 중앙의 막부정권 및 지방의 중소영주들과 외교교섭을 전개하면서, 왜구를 평화적인 통교자로 전환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이 취한 정책으로는 도항지의 제한, 즉 포소와 왜관제도, 도항자를 제한하기 위한 行狀 ․ 圖書 ․ 書契 ․ 文引, 근해에서 어로행위를 하는 왜인을 통제하기 위한 釣魚 ․ 收稅規定, 사송왜인을 통제하기 위한 上京路나 接待規定 등이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러한 여러 가지 규정을 제도화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의 모든 통교자를 조선을 중심으로 하는 기미질서에 편입시켜갔고, 1443년 癸亥約條를 통하여 여러 제도를 가시적으로 완성하였다고 보아진다.
그러나 성종대에 들어와 1478년 이후 1494년 사이에는 대마도 및 삼포항거왜인의 어업에 대한 금약이 해이해져 왜구가 매년 발생했고, 그에 대한 응징 및 대책사료도 증가한다. 그 후 중종대에는 양국간에 누적된 문제에 의해 1510년 삼포왜란이 일어났고, 1512년 임신약조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 그러나 불안정한 양국관계는 다시 1544년 사량진왜변을 유발시켰고, 1547년 정미약조에 의해 다시 수습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정미약조에 의해 불이익을 받은 대마도는 세견선 증가를 비롯한 종래의 권익을 되찾기 위해 더욱 많은 僞使를 파견하여 제권익의 부활공작을 계속했고, 결국 명종 말년에 이르면 종래의 권익을 거의 보장받게 된다. 최근 위사에 관련된 연구가 새로운 관심사가 되고 있는데, 앞으로 조선전기 僞使問題의 규명은 조선전기 한일관계사의 중요한 연구테마가 될 것이다.
다음 선조시대의 7,501건의 기사는 임진왜란 때문에 사료의 발췌도 기본적으로 한일관계나 일본관련 기사는 물론이고, 임진왜란의 전황을 피악하는데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기사를 포함시켰다. 아직 기사내용을 분류중에 있지만, 임진왜란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일본의 침략과 그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사료가 발췌되어야 하고, 분류항목이 정해져야 한다. 따라서 일본군의 침입과 그에 대한 대책, 응전상황, 국왕의 이동이나 동태, 명군관계, 의병관계, 조선의 피해, 강화교섭(통신사파견이나 전쟁중의 강화교섭, 임란직후부터의 강화교섭, 탐적사 및 회답사의 파견과정)등 선조대의 한일관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기사는 모두 발췌했다.
2) 조선후기
조선후기의 경우, 1608년 광해군대부터 1863년 철종대까지 255년간 1,471건의 기사가 수록되었다. 이를 내용별로 분석해 보면 다음표와 같다.
왕대별 | 년 도 | 왜란 관계 |
포상 관계 |
일본 정세 |
일본 대비 |
조선 견사 |
일본 견사 |
왜관 무역 |
외교 의례 |
표류 | 중국 관계 |
류구 관계 |
기타 | 계 |
광해군 | 1608~1622 | 18 | 48 | 8 | 28 | 21 | 8 | 52 | 33 | 1 | 49 | 22 | 13 | 301 |
인 조 | 1623~1649 | 24 | 17 | 31 | 24 | 17 | 18 | 32 | 33 | 19 | 31 | 9 | 19 | 274 |
효 종 | 1649~1659 | 1 | 3 | 8 | 5 | 6 | 4 | 11 | 9 | 4 | 6 | 1 | 8 | 66 |
현 종 | 1659~1674 | 2 | 14 | 1 | 2 | 2 | 62 | 4 | 16 | 1 | 6 | 24 | 134 | |
숙 종 | 1674~1720 | 11 | 22 | 14 | 21 | 13 | 6 | 59 | 49 | 9 | 10 | 4 | 50 | 271 |
경 종 | 1720~1724 | 1 | 1 | 1 | 1 | 2 | 6 | |||||||
영 조 | 1724~1776 | 12 | 27 | 7 | 15 | 6 | 24 | 26 | 6 | 4 | 1 | 27 | 155 | |
정 조 | 1776~1800 | 3 | 21 | 4 | 10 | 2 | 3 | 13 | 12 | 14 | 7 | 27 | 16 | 132 |
순 조 | 1801~1834 | 1 | 25 | 7 | 1 | 4 | 9 | 7 | 31 | 6 | 21 | 112 | ||
헌 종 | 1835~1848 | 1 | 1 | 1 | 4 | 1 | 1 | 1 | 5 | 15 | ||||
철 종 | 1848~1863 | 1 | 4 | 5 | ||||||||||
계 | 1608~1863 | 73 | 178 | 80 | 107 | 70 | 51 | 263 | 203 | 701 | 109 | 80 | 187 | 1471 |
조선후기 256년간 기사가 가장 많았던 왕대는 광해군대이고, 다음이 인조 ․ 숙종 ․ 영조 ․ 정조의 순이며, 가장 적은 왕대는 철종 ․ 경종 ․ 헌종이다. 물론 기사의 많고 적음은 재위기간과도 관련이 있지만, 그보다는 일람표에서 알 수 있듯이 임란직후가 가장 많았고, 개항 직전인 19세기 중반에 가장 적었다. 임란직후에 기사가 많은 것은 임란후 전쟁의 후유증과 뒤처리 및 단절된 한일관계를 재개하는데 따른 여러 가지 문제, 그리고 명 ․ 청교체시기의 한일관계 등을 고려하면 그 이유가 납득이 되지만, 19세기 중반기에 적어지는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한편 내용별로 특징을 보면, 첫째, 외교의례에 관한 기사가 제일 많다. 이것은 조선후기 한일관계가 기본적으로는 양국의 국가적인 통제하에 각종의 외교적인 틀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상호간에 많은 사절왕래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사가 많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조선에서는 12회에 걸쳐 막부 장군에게 사신(回答兼刷還使 3회, 通信使 9회)을 파견했고, 대마도주에게는 54회에 問慰行을 파견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대마도가 매년 정기적으로 八送使를 파견하고 부정기적으로 大差倭․小差倭를 수시로 파견했음을 고려하면, 양국사이의 외교관계가 얼마만큼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둘째, 임란때의 전공자 및 殉節 ․ 孝子 ․ 殉孫들에 대한 논공행상 및 포상기사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정세와 대비에 관한 내용도 상당한 숫자임을 볼 때, 조선왕조의 일본인식은 기본적으로 적대감과 경계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倭館關係 기사인데, 이것은 1609년 己酉約條이후 양국사이에 무역이 이루어지면서, 왜관에 일본인의 거주가 허용되자, 이들 간에는 물론 조선인들과 각종의 마찰이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잠상과 밀매에 관한 사건도 적지 않게 등장하는 등 왜관을 무대로 하는 많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넷째, 중국과 유구에 관한 기사도 많다. 이들 기사들은 조선과의 개별관계가 아니라, 모두 일본에 관련된 기사들이다. 예를 들면 중국관계의 경우 광해군 ․ 인조대에는 후금과 청에 관한 기사가 많은데, 중국에서의 정세변동이나 조선침략 기사 등에 관한 조일양국의 정보교환 기사가 많다. 한편 유구관계 기사도 많은데 1609년 유구가 薩摩州의 침공에 의해 일본에 복속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의 교류가 북경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시대 한일관계의 연구가 단순히 조선과 일본만의 관계차원에서 다루어서는 안되며, 동아시아 국제관계 속에서 폭넓게 분석되어져야 한다. 그 외 漂流에 관한 기사가 있고, 기타로 분류된 항목에서는 다양한 관계를 보여주는 기사가 많아, 이를 통해 조일관계의 여러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볼 때, 조선후기 한일관계의 가장 큰 현안은 역시 임진왜란이후 전쟁의 후유증과 뒤처리 문제, 일본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의식, 단절된 통교관계의 회복, 왜관의 운영문제였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한일관계가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일원적인 관계가 아니라 중국과 유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3) 유구관계
『朝鮮王朝實錄』에는 1392년부터 1840년까지 총 437건의 유구관계 사료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사료의 내용을 보아도 조 ․ 유관계의 모든 부분을 망라하고 있어서 조유관계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유구 관계사료의 내용을 종류별과 연대별로 분류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왕대 | 유구 사신옴 |
조선 사신감 |
조회 | 접대 | 위사 관련 |
피로인 | 표류민 | 무역 | 유구 사정 |
일본 관련 |
중국 관련 |
불경 청구 |
기타 | 계 | |
유구 | 조선 | ||||||||||||||
태조(1392~1398) | 4 | 2 | 2 | 1 | 9 | ||||||||||
정종(1398~1400) | 1 | 1 | |||||||||||||
태종(1400~1418) | 2 | 1 | 3 | 1 | 2 | 9 | |||||||||
세종(1418~1450) | 5 | 2 | 6 | 2 | 3 | 2 | 6 | 1 | 2 | 1 | 3 | 1 | 14 | 48 | |
문종(1450~1452) | 1 | 3 | 4 | ||||||||||||
단종(1452~1455) | 1 | 2 | 1 | 1 | 1 | 6 | |||||||||
세조(1455~1468) | 15 | 8 | 13 | 8 | 2 | 2 | 2 | 1 | 2 | 7 | 4 | 6 | 70 | ||
예종(1468~1469) | 1 | 1 | |||||||||||||
성종(1469~1494) | 13 | 1 | 33 | 3 | 5 | 7 | 3 | 5 | 16 | 86 | |||||
연산(1494~1506) | 2 | 2 | 1 | 4 | 1 | 1 | 2 | 1 | 3 | 17 | |||||
중종(1506~1544) | 3 | 1 | 2 | 18 | 11 | 1 | 2 | 16 | 4 | 58 | |||||
명종(1545~1567) | 1 | 1 | 2 | 1 | 5 | ||||||||||
선조(1567~1608) | 3 | 18 | 17 | 5 | 43 | ||||||||||
광해(1608~1623) | 7 | 3 | 4 | 8 | 22 | ||||||||||
인조(1623~1649) | 3 | 1 | 1 | 4 | 9 | ||||||||||
효종(1649~1659) | 1 | 1 | |||||||||||||
현종(1659~1674) | 6 | 6 | |||||||||||||
숙종(1674~1720) | 2 | 1 | 3 | 1 | 7 | ||||||||||
영조(1724~1776) | 1 | 1 | |||||||||||||
정조(1776~1800) | 10 | 14 | 3 | 27 | |||||||||||
순조(1800~1834) | 6 | 6 | |||||||||||||
헌종(1834~1849) | 1 | 1 | |||||||||||||
총 계 | 46 | 3 | 18 | 51 | 16 | 10 | 59 | 28 | 10 | 5 | 46 | 63 | 10 | 72 | 437 |
위 표를 통하여 『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유구 관계사료의 특징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과 유구가 국가간의 공식적인 교류는 주로 조선전기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후기에는 표류민 송환이나 중국 또는 일본에 관련된 사료가 대부분이다. 둘째, 조 ․ 유간의 사신왕래는 주로 유구에서 조선에 온 사신이 대부분이고, 조선에서는 단지 2번만 사신이 파견되었다. 셋째, 유구에서 조선에 온 사신들은 거의 상경하여 조선국왕을 알현했으며, 조선에서는 이들은 상국의 입장에서 후한 접대를 행했다. 넷째, 조선측의 유구사신에 대한 우대는 위사의 발생을 초래했고, 이들은 경제적인 이익이나 불경청구를 목적으로 왕래했다. 다섯째, 조선초기 조류관계는 피로인 쇄환을 명분으로 시작되며, 중 ․ 후기에는 양국의 표류민 송환의 명분으로 바뀌어 진다. 여섯째, 양국교류의 경제적인 측면을 보면 유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무역이며, 조선은 유구를 통하여 동남아산 물자를 수입하고, 유구는 동남아산 물자의 중계역할을 행했다. 일곱째, 조선은 사신이나 표류민을 통하여 유구사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구의 정황이나 지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여덟째, 조선과 유구의 교류가 제일 빈번했던 시기는 15세기 중반부터 1세기간이며, 조선중기인 양란을 전후해서는 일본의 정세를 자세히 알려오고 있으며, 조선후기에는 주로 중국을 통해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홉째, 조선은 유구이외에도 동남아의 久邊國이나 爪蛙國과도 여러 차례에 걸쳐 교류를 행하고 있다.
3. 맺음말
이상에서 이 사료집성에 수록된 기사를『朝鮮王朝實錄』중의 기사를 중심으로 대체적인 개황을 살펴보았다. 이 내용을 통해 한일관계 기사의 특징을 보건데, 조선전기의 경우 왜구의 침략과 응징 및 대책 그리고 그에 관계된 포상 처벌이 가장 많았다. 이는 결국 조선전기 대일관계의 기조는 왜구에 관한 사항이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음으로 朝鮮遣使와 日本遣使 등 사절왕래였는데, 이는 조 ․ 일 양국이 모두 현안문제를 외교적인 방법에 의해 풀어간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러나 사절파견에 있어서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두 가지 항목의 특징을 분석하여 有井智德은 ‘조선전기의 日朝關係는 결코 평등 ․ 호혜의 관계는 아니었고, 일본(일본전체는 아니지만)은 조선에 대하여 침략적이었다는 점과 일본은 통교무역관계에 있어서 커다란 이익을 받았다는, 말하자면 일본은 受益者였고, 조선은 利益을 준 입장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쨌든 조선의 입장에서, 전기의 현안은 어떻게 하면 倭寇를 通交者로 전환시켜 가는가가 가장 큰 문제였고, 선조대에는 일본의 침략과 대응, 후기의 경우는 전쟁에 의해 붕괴된 교린관계를 재확립하고, 통신사와 왜관을 통해 유지해 간다는 외교적인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고 파악된다. 나아가 對日政策의 기본 틀은 중국과 유구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제관계속에서 交隣體制를 유지해 가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아직 각 왕대별 기사나 임진왜란에 관한 기사내용을 정밀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물론 발췌자의 문제의식이나 관점에 따라 분류방식이나 분석이 달라지는 만큼, 그렇게 간단한 작업은 아니겠지만, 향후 이 자료집성에 의해 보다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져 그만큼 다양한 한일관계사의 해석과 전망을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다음 이들 사료를 『史料集』으로 편찬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해 보자.
『朝鮮王朝實錄』에 수록된 일본관계기사를 사료집으로 편찬하는 작업은 이미 1967년에 田村洋幸에 의하여 『日朝關係編年史料』(태조~태종)가 발간된 바 있고, 1970년대 초부터는 東京敎育大學 東洋史學敎室 관계자를 중심으로 「중국 ․ 한국의 사적에 있는 日本史料編纂會」가 결성되어 중국 및 한국사료에 대한 편찬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삼국․고려에 대한 편찬은 이미 완료(권1)되었고, 조선시대는 방대한 양 때문에 2002년 현재『宣祖實錄』제65권(1595년도)까지 『日本史料集成』 12권으로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중단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 이유는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고령화되어 세상을 떠났기때문이라 한다. 아쉬웁게도 『日本史料集成』은 『朝鮮王朝實錄』에서 사료를 발췌하여 활자본으로 재출판하였기 때문에, 발췌과정에서 누락이 있을 수 있었고, 또 활자본에 오자나 탈자가 있는 경우가 상당히 발견되었다.
이 사료집성은 이러한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원문을 그대로 발췌․복사하여 영인하고, 원문과 함께 한글 번역문을 첨부하여 29권으로 편집하였다. 그리고 전체기사 내용을 六何原則(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에 의해 재작성하여 3권의 기사연표집을 편찬하여 총 32권으로 구성하였다. 앞으로 이 사료집과 연표집을 DB로 구축하여 검색이 가능하도록 CD—ROM도 제작하여 20년전의 꿈을 이루어 볼 생각이다.
한편 임진왜란 전공자인 北島万次씨도 개별적으로 『壬辰倭亂 史料集』을 작성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외에도 항목별로 사료를 정리한 것으로 村井章介 ․ 荒野泰典 ․ 高橋公明 ․ 孫承喆의 『倭館關係記事集』, 關周一의 『被擄 ․ 漂流人年表集』, 池內敏의 『漂流民年表集』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