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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전투 후에 양 총병이 왜적에 대한 정보 부족을 질책했다고 심희수가 보고하다.
이에 앞서 부총병 조승훈(祖承訓), 유격장군 사유(史儒)·왕수관(王守官) 등이 평양에 진격하여 17일 동틀 녘에 평양으로 돌격, 성에 포를 쏘고 관을 부수면서 길을 나누어 쳐들어가 몸을 돌보지 않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사유가 사졸보다 앞장서서 천총(千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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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우참의 형이 평양성 전투의 패배를 보고하다.
요동우참의(遼東右參議) 형(邢)이 상주하였는데, 그 대략에,
“요동순무(遼東巡撫)의 당보에 ‘부총병조(副總兵祖)가 7월 7일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유격(遊擊) 사유(史儒)와 천총(千摠) 장국충(張國忠)·마세룡(馬世龍) 등이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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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진에서 총병 조승훈 등을 파견하여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다.
요진(遼鎭)에서 총병 조승훈(祖承訓), 참장 곽몽징(郭夢徵), 유격 사유(史儒)·왕수신(王守臣)·대조변(戴朝弁) 등을 파견하여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한 채 사유는 전사하고 승훈은 퇴각하여 가산(嘉山)에 주둔하였다. 요진에서 먼저 승훈 등을 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