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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일2021한일관계사연구본 논문은 전쟁 2년차에 접어든 남해안 철수 이후 1593년 7월부터 송응창이 소환되는 1594년 2월까지 강화교섭에서 빠진 조선이 주전론에 입각한 긴밀한 조명 군사 협력의 재개와 對일 군사 억제력의 신장을 추구하며 對일 전략을 수립한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조선은 자국과는 끊임없는 긴장 관계를 조성하고 명과는 교섭을 이어간 일본군의 양면책에 대해서 전라도・서해안 공격설 등 일본군의 재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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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순2020한일관계사연구본 연구에서는 16세기 후반에 있었던, 통신사라고 불리는 두 차례의 대일사행[1590년, 1596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두 번의 통신사행은 임진왜란이라는 동아시아 국제 전쟁의 전야 내지는 와중에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통신사=‘평화의 사절’이라는 통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외교사행이었다. 1592년 일본의 사행 파견 요청에 대해 조선은 통신사의 파견으로 이해했지만, 일본 측은 入貢使節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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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2018한일관계사연구이 논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강화교섭 결렬 선언 이후,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조선의 재침 대응책을 살펴보았다. 강화교섭기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된 황신은 교섭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의 사행록인 『日本往還日記』를 통해 강화교섭의 결렬 당시의 상황에 접근할 수 있다. 황신은 일본에서 미리 사람을 보내어 이 소식을 전하였고, 부산에 도착한 후에는 조정에 보고서를 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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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태2014본 논문은 임진전쟁기에 진행되었던 조선‧명‧일본 세 나라 사이의 강화교섭에 대한 연구이다. 강화교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 발발 직전 쓰시마(對馬)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조선의 교섭부터 분석 대상에 두어야 한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의 평양 탈환 전투와 정유재침기의 전투시기를 제외한 전쟁의 전 기간 동안 강화교섭은 계속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망하고 일본군과 명군이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