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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 권응수가 적을 격파하고 성을 회복하다.
별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永川)의 적을 격파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安東)에 주둔한 적과 서로 응하여 일로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사민이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朴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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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 의병장 유종개가 적에 패하여 전사하다.
경상좌도 의병장 유종개(柳宗介)가 적을 만나 패하여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경상좌도의 산협(山峽)과 해빈의 10여 고을은 적로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서 사족(士族)들은 험한 지역을 의지하여 병란을 피하고 여리에서는 의구하여 모두 ‘만약 군사를 모으면 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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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심희수가 사직을 청하는 차자에 왜란 때 종사관이 되었다가 근왕할 계책을 세웠다고 하다.
〈우의정 심희수(沈喜壽)가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신은 난리를 당한 처음에 경상좌도 방어사의 종사관이 되어 안동에 도착해 들으니, 왜적 수만 명이 조령을 넘어 한강으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방어사와 상의하여 사잇길로 서울에 가서 근왕할 계책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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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사신의 접대와 세견선에 필요한 요미 등을 경상도의 전세를 면제하여 양향으로 삼게하다.
경상도 13고을의 전세를 면제하여 본도의 양향으로 삼게 하였다. 경상도 좌우 주사에게 1년에 방출하는 양향이 5천여 섬 이상이었으므로, 전부터 본도의 매년 전세를 상도 안동 등 10고을은 서울로 상납하고, 그 이외는 정격의 양향에서 제외시켜 유치하였다가 군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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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에서 각 년의 세견선이 오지 않아서 미포가 많아 왜공을 대기에 충분하다고 아뢰다.
호조가 아뢰기를,
“평상시의 항식 수용과 별례의 경비로 쓰는 목면 및 이번의 천추사(千秋使)와 성절사(聖節使)의 별행차 때에 예물로 쓰는 백저포와 흑마포(黑麻布) 등의 값과, 제각사에서 당물을 무역하는 값과 사신의 반전 등을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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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감사가 관에 머무는 왜인이 1천여 명에 이르러 접대비를 마련하기가 어렵다고 아뢰다.
〈오시에 왕이 선정전에 나아가 경상감사 박경신(朴慶新), 전라감사 이창후(李昌後)를 인견하였는데, 우부승지 이명남(李命男), 기사관 한유상(韓惟翔)·김주하(金奏夏)·신게(申垍)가 입시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안동과 나주가 비록 보장이 될 만하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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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관왜가 안동으로 도망쳐 숨자, 이를 체포하여 일본으로 되돌려 보내다.
부산의 관왜(館倭)가 안동(安東)으로 도망쳐 숨었는데 체포하여 그의 나라로 되돌려 보내는 한편, 그를 숨겨준 우리나라 사람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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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조태억이 대마도주 아들 언천대에게 도서를 주지 않을 수 없다고 아뢰다.
통신사 조태억(趙泰億), 부사 임수간(任守幹), 종사관 이방언(李邦彦)이 청대하였다. 조태억이 말하기를,
“언천대(彦千代)【곧 대마도주의 아들이다.】가 도서를 만들어 주기를 청한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아직까지도 준허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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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와 청대하여 행차 중의 잔치와 흑각의 무역 정지, 잠상의 처벌 등에 중을 논의하다.
통신정사 홍치중(洪致中)·부사 황선(黃璿)·종사관 이명언(李明彦) 등이 청대하자, 세자가 불러 보았는데, 홍치중이 말하기를,
“옛부터 통신사의 행차에는 으레 충주(忠州)·안동(安東)·경주(慶州)에서 잔치를 베푸는 일이 있었는데, 을미년·임술년·신묘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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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에 대한 잔치를 줄이도록 하다.
통신사 홍계희(洪啓禧) 등이 청대하고, 동래에서 잔치를 베푸는 것은 전례대로 하되, 충주·안동·경주 세 고을에서 베푸는 잔치는 아울러 정지하고 줄이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