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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7년(1204) 갑자년
7년 봄 정월
정묘일. 최충헌이 다시 문병하자 왕은,
“과인이 신하의 신분에서[藩邸 번저 궁궐(宮闕) 밖에 있는 제왕(帝王)의 저택(邸宅)을 말한다.]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공의 힘이었소. 이미 연로한데다 병까지 덧쳐 덧쳐 미류(彌留)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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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논평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임금으로서, 사람들의 생사와 관리의 임명 등 모든 일이 최충헌의 손에서 나왔다. 왕은 다만 이름뿐인 왕위를 차지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의 위에 있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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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즉위년(1204) 갑자년
정월
정축일. 신종(神宗)이 죽었다.
2월
경신일. 신종을 양릉(陽陵)에 장사지냈다. 낭중(郞中) 임영령(任永齡) 임영령 고종 2년(1215) 4월에 대사성(大司成)으로 국자감시를 주관하였는데 이 시험에서 김문로(金文老)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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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원년(1205) 을축년
여름 4월
신해일. 추밀원사(樞密院使) 김평(金平)이 죽었다.
6월
갑오일. 홍문공도(弘文公徒) 홍문공도 사학 12도(徒) 중 하나로, 고려 현종 때의 시중 정배걸(鄭倍傑)이 만든 학교이다.의 생도들이 최충헌에게, 자기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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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3년(1207) 정묘년
3년 봄 정월
○ 지난 해 겨울부터 산 서쪽에 사는 고위관리들이 많이 죽자 무반(武班)에서는 동반(東班)(문반)사람들이 저주했기 때문이라 의심하면서 자주 불만의 말을 늘어놓았다. 이에 왕이 내시(內侍)의 관원을 시켜 중방(重房)과 장군방(將軍房)에 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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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4년(1208) 무진년
4년 봄 2월
을묘일.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다. 태사(太史)가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신(辰)․사(巳)가 들어가는 해에는 명당(明堂) 명당 왕자(王者)가 정교(政敎)를 시행(施行)하는 묘당(廟堂)을 말한다. 시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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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5년(1209) 기사년
5년 봄 정월
정유일. 왕이 금나라의 임금 임금 금나라 장종(章宗)을 말한다. 장종은 희종 4년 11월에 사망했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봉위사(奉慰使)로 사홍기(史洪紀) 사홍기(?~1227) 사홍기의 세계는 확인할 수 없으나 고종 8년(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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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6년(1201) 경오년
6년 봄 2월
계유일. 연등회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정해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다.
3월
갑오일.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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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7년(1211) 신미년
7년 봄 정월
계사일. 왕숙(王璹)을 수사공(守司空)․상주국(上柱國)․한남공(漢南公)으로 책봉하고 이름을 왕정(王貞)으로 바꾸게 한 다음 연등연(燃燈宴)에 참석하도록 했다.
윤정월
을유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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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논평
사신(史臣)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당시 최충헌이 국권을 장악한지 이미 여러 해가 된지라 자기 일당들을 도처에 심어놓고 상벌을 제 마음대로 내렸으니 희종이 비록 올바른 정치를 하려해도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왕이 할 수 있는 계책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