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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20년(937) 정유년
20년 여름 5월
계축일. 김부(金傅)가 금박을 새겨 넣고 옥으로 장식한 네모꼴 허리띠를 바쳤는데 길이가 열 발이고 대구(帶鉤) 대구 혁대의 두 끝을 서로 걸거나 끼어 맞추어 띠를 죄는 쇠붙이의 띠고리이다.가 62개였다. 신라는 이를 근 4백년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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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26년(943) 계묘년
26년 여름 4월
○ 왕이 내전(內殿)으로 나가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를 부른 다음 친히 「훈요(訓要)」 훈요 태조 25년(942)에 왕건 자신이 지어 자손들을 훈계한 「신서훈요10조(信書訓要十條)」를 말한다. 구성은 서론 부분이라 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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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 2년(945) 을사년
2년
○ 후진이 범광정(范匡政)과 장계응(張季凝)을 보내 왕을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칙서를 내렸다.
“올린 글을 살펴보고 그대가 부왕의 유언과 관리들의 추대로 권지국사(權知國事)의 임무를 맡게 된 것을 다 알았다. 그대 나라[圭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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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腎의 논평
이제현은 그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우보(羽父) 우보 이름이 휘(翬)이며, 노나라 은공(隱公) 때의 공자(公子)이다. 처음 은공에게 환공(桓公)을 죽이고 태재(太宰)가 되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도리어 환공에게 참소하여 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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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즉위년(945) 을사년
9월
기유일. 왕규(王規)가 역모를 꾸미다가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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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현李齊腎의 논평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정종은 임금의 존귀한 몸으로 10리나 떨어진 사원까지 걸어가서 불사리(佛舍利)를 안치했고 또 7만 석이나 되는 곡식을 승려들에게 하루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고도 한번 하늘의 견책을 받자 제 정신을 잃고 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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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26년(1196) 병진년
26년 봄 정월
정유일. 금나라에서 가익(賈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대관전(大觀殿)에서 금나라 사신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2월
정묘일. 개경에 지진이 발생했다.
임신일. 추밀원사(樞密院事) 이준창(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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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5년(1202) 임술년
5년 봄 정월
초하루 정미일. 신년 하례행사를 생략했다.
2월
신사일. 전국의 경죄수들을 석방했다.
3월
정사일. 총재(冢宰) 최선(崔詵)과 승선(承宣) 우승경(于承慶)이 예빈성(禮賓省)에서 통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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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6년(1203) 계해년
6년 봄 정월
초하루 신미일. 신년 하례행사를 생략했다.
기축일.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했다.
을미일. 왕이 수문전(修文殿)에서 친히 제석도량(帝釋道場)을 열었다.
2월
을사일. 왕이 법운사(法雲寺)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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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5년(1228) 무자년
15년 봄 정월
초하루 병자일. 지진이 발생했다.
계미일.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김변(金弁)을 동북면병마사로, 대장군 대집성(大集成)을 서북면병마사로 임명했다.
무술일.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했다.
기해일. 선경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