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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2014인문사회과학연구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조공(朝貢) 관계를 맺고도, 조선 문인들은 청나라를 중화(中華로) 여기지 않았다. 그랬기에 연행(燕行) 초기에는 기록을 별로 남기지 않았으며, 북경(北京)에 가서도 그곳 지식인들과 한시를 주고받거나 필담(筆談)을 나누지 않았다. 1765년의 홍대용(洪大容), 김재행(金在行)이나 1780년의 박지원(朴趾源)에 와서야 청나라 지식인들과 필담을 나누거나 면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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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묵2011韓國 詩歌硏究동아시아에서 한시는 同文意識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 가치를 가졌기에 한시의 제작 능력이 문명의 지표로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明에서 온 사신과 朝鮮문인이 서로 만나 漢詩를 제작하는 것은 단순한 유흥이 아니라 文明의 고하를 두고 벌인 대결이라 할 만하다. 한편 조선으로 온 중국의 문사들이 조선의 시를 채집하여 중국에 가져가고 또 중국에서는 역대 중국의 한시를 정리하면서 조선의 시를 채집하여 포함하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