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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관 조안방이 도원수 진영에 다녀오면서 목격한 참상을 서계하다.
선전관 조안방(趙安邦)이 서계하였다.
“신이 정월 11일에 품첩을 갖고 제독에게 가서 문안한 후에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의 진으로 달려가서 군량과 군인의 수를 조사하려 하였는데, 요사이 빗물이 계속 불어나 도로가 5일 동안 불통하였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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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을 행재소로 부르는 일을 논의하라고 전교하다.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풍원부원군 유성룡(柳成龍)이 병이 차도가 있으면 남쪽으로 내려간다고 하였는데, 그 곳에는 이미 도원수 등 여러 장수가 있으니 풍원부원군이 남쪽으로 가더라도 특별히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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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병사 권응수 등이 울산에서 적과 싸운 일을 보고하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치계하였다.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권응수(權應銖)의 치보에 ‘8일에 울산(蔚山) 서문 밖 4~5리 거리에 적도가 온 구학(丘壑)에 가득히 널려 있으면서 스스로 무리 가 많음을 믿고 의기양양하여 날뛰므로 척후장(斥候將) 정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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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원 ․ 이항복 ․ 길회 ․ 조존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명원(金命元)을 분호조판서(分戶曹判書)로, 이항복(李恒福)을 관상감제조(觀象監提調)로, 길회(吉誨)를 사간원헌납으로, 조존성(趙存性)을 사간원정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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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의 설치 문제로 내려가는 호택 등에게 김명원을 딸려 보내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관을 설치하고 성을 쌓는 일은 지금 서두를 바가 아닐 뿐더러 물력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호(胡)·심(沈) 두 사람이 경략과 제독의 지시에 따라 가서 살피고자 하니 우리나라를 위하는 뜻이 지극합니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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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수 김명원이 유정에게 구원을 청하고, 최원을 구원군으로 보내다.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치계하였다.
“대구에 도착하여 유정(劉綎)을 만나서 일이 급하니 구원을 요청한다는 사유를 극력 말하였더니, 간섭을 받고 있기 때문에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 상당히 있었는데, 그 뜻을 즉시 경략과 제독에게 치보하였습니다.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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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서침을 틈타 적의 소굴을 무찌르는 일로 경략에게 자문을 보내다.
“조선국왕이 적이 서침하는 틈을 타서 적의 소굴을 무찌르겠다는 일입니다.
이 달 7일에 받은 제도순찰사 김명원(金命元)의 치계에 의하면 울산군수(蔚山郡守) 김태허(金太虛)의 비보에 ‘도회군(逃回軍) 황말춘(黃末春)이 금년 4월 23일 포로가 되어 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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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이 호조판서 김명원을 탄핵하고 환도 날자를 결정하자고 아뢰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호조판서 김명원(金命元)은【사람됨이 지나치게 순후하여 원수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다.】사변이 난 초기에 원수의 중책을 맡아 전후 겁을 먹고 물러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견벌(譴罰)을 면한 것은 사세가 부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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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이 진주성의 상황, 유정의 반응 등을 보고하다.
접반관 성균직강 서성(徐渻)이 치계하였다.
“함안(咸安)이 분궤된 뒤로는 적의 형세가 매우 성하여 살육의 화가 전년보다 심합니다. 적의 선봉이 이미 진주에 도착하였으므로 우도관찰사 김늑(金玏)과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의 급함을 알리는 통보가 하루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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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당초에 적추(賊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제추의 군대를 합치면 30만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자는 7~8만 명이라고 하였다. 왜적이 수륙으로 함께 나아가 진주를 공격하려 할 때 총병(總兵) 유정(劉綎)은 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과 함께 대구(大丘)에 있고,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