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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8년 (1477)
당포만호 김중손 ․ 봉수군 윤원기 ․ 김원경 등에게 형을 내리다.
형조에서 아뢰기를, “당포만호(唐浦萬戶) 김중손(金仲孫)이 멋대로 병선을 보내어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가 졸지에 왜인을 만나 의복과 군장을 빼앗기었으니, 죄가 장(杖) 100대에 먼 변방에 충군하는 데에 해당하고, 봉수군(烽燧軍) 윤원기(尹元奇) · 김원경(金元京)이 봉화를 들지 않은 죄는, 율이 참형에 처하는 데 해당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르고 윤원기 등은 사형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국역고려사DB › 제신(諸臣) › 김인경(金仁鏡) 부 김승무(金承茂)
김인경金仁鏡 부 김승무金承茂
김인경의 손자 김승무(金承茂)는 용모가 멋있었고 재주와 학식을 갖추었다.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사한(史翰)을 역임했으며, 김준(金俊)의 인정을 받아 여러 번 승진해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당시 승선(承宣) 허공(許珙)이 정권을 잡자 여러 도의 안찰사(按察使)가 허다히 뇌물을 보냈다. 강헌(康軒)․한완(韓琓)도 허공에게 빌붙어서 뇌물을 많이 받았으므로, 모두 김승무로부터 탄핵을 당하게 되었는데 허공이 이 때문에 그를 미워하였다.
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28년 (1595) 4월
봉왜명사 접반사 이정립이 사신 접대에 관하여 치계하다.
봉왜명사 접반사 이정립(李廷立)이 치계하기를, “이번 사신은 항상 차등을 두어 접대하는가 의심하여 예사로 질책하는데, 그의 일행중에는 사 행인 때의 하인이 많이 있어서 모든 일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안주에서는 예전부터 사신을 맞이하여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이번에는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까 염려되어 하는 수 없이 신이 관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하여 평양에 나가 있는 양포정(楊布政)의 문안관 강신(姜紳...
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명종실록 › 명종 16년 (1561)
헌부가 진도군수 이숙남을 원래의 조율로 치죄할 것을 청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진도군수 이숙남(李叔男)은 …… 나라에 관계되지 않는 실없는 공으로 받지 못할 분수 밖의 상을 외람되이 받았으면 감격하여 보답할 것을 도모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도리어 교만 방자한 마음을 먹고, 바람이 잔잔하여 방비가 긴요한 때에 어미의 병을 핑계대고 멋대로 임지를 이탈하였습니다. 그 본심을 더듬어보면 더 좋은 벼슬을 바라는 의도가 없지 않습니다. 멋대로 하고 법을 무시하였으니 매...
국역고려사DB › 충의(忠義) › 정문감(鄭文鑑)
정문감鄭文鑑
정문감은 과거에 급제해 직학(直學)에 임명되었다. 원종 11년(1270),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제멋대로 관직을 설치하고는 정문감을 승선(承宣)으로 임명해 정무를 맡게 했다. 정문감은, “적도 편에 붙어서 부귀를 누리느니 차라리 저승으로 가 몸을 깨끗이 지니련다.” 하고는 바로 강물에 투신해 자결했다. 그의 처 변씨(邊氏)도 정문감이 자결하는 것을 보고 역시 강물에 투신했다. 변씨는 서해(西海) 안찰사(按察使) 변윤(邊胤)의 딸이다.
국역고려사DB › 간신(姦臣)
姦臣
세상에 간신(姦臣)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다. 다만 현명한 임금이 그들을 잘 살펴 적절히 부림으로써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어나갔기 때문에 그들은 제멋대로 술수를 부릴 수 없었다. 만약 임금이 한번 그 술수에 빠지면 나라를 위기에 빠트려 패망에 이르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 고려는 인종(仁宗) 이후부터 간신이 계속 나와 권력을 농단하여 백성을 좀먹고 나라를 패망케 하였다. 그 일이 모두 후세에 감계(鑑戒)가 될 만하므로 간신전...
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성종실록 › 성종 20년 (1489)
야대에 나아가 수적들을 잡도록 이르다.
야대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 참찬관 한건(韓健)이 아뢰기를, “신이 을사년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로 나갔었는데, 연해의 고을에 수적들이 멋대로 다니며 사람들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므로 해안의 길이 통하지 못했었으니, 마땅히 끝까지 추격하여 잡아내어 해안 길이 다시 통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런 수적들의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되니, 계책을 마련하여 잡도록...
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27년 (1594) 9월
도원수 권율의 전과에 대해 치계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하였다. “왜적(倭賊) 200여명이 고성(固城) 지방에 하륙(下陸)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는데 복병장(伏兵將) 최강(崔堈)이 소탕해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므로 김덕령(金德齡)으로 하여금 군사 200명을 뽑아 힘을 합해 복병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갈 적에 복병이 싸우다 후퇴도 하며 혹은 요로(要路)로 곧장 달려가 숨어서 요격한 결과 비록 1급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