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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26년 (1593) 8월
전쟁터에 나가 있는 사람의 가족에 대한 요역 침탈을 금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미 역전했던 장사들로서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조정에서 우대하여 구휼하고 포상하기를 서둘러야 하는데도 또 그들을 전쟁터로 몰아 보내는 것은 매우 타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남방에 군량이 결핍되었으므로 용병이 아무리 많아도 이미 훈련을 받은 정병만 못하기 때문에 부득이 그들을 다시 보낸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에게 독현(獨賢)의 탄식이 있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26년 (1593) 8월
영의정 최흥원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적에 대한 조처를 요청하다.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이 치계하기를,【이 달 27일, 서울에 있으면서 한 것이다.】 “심유격(沈遊擊)이【유경(惟敬)】거느리고 온 왜놈들을 의리에 따라 죽이지도 못하고 중국 장수에게 구애되어 관름까지 주어가면서 머물게 하고 있으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척유격(戚遊擊)이 강력히 금하여 목책 속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지만 중국 군사와 내통하여 멋대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약탈을 자행하고 있으니 매우 통분합니다. 용산(龍山)에 있는 왜적도 일...
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연산군일기 › 연산군 2년 (1496)
승지 신수근이 왜인의 어량 쟁탈일을 아뢰다.
승지(承旨) 신수근(愼守勤)이 아뢰기를, “전일 김일손(金馹孫)이 아뢴 바에 의하면, ‘지난 갑진년에 제포(薺浦)에 있는 왜인이 떼를 지어 금한을 넘어서 웅천(熊川) 성 밑의 소나무를 베어 가고 심지어 산지기까지 구타하였으므로, 현감 최진강(崔進江)이 친히 가서 그 왜의 괴수를 포박하였는데, 왜가 도리어 쫓아와서 제멋대로 포박한 것을 풀어 주었다.’ 하니, 그 법을 무시하고 방자하게 군 죄를 다스리지 않아 국가의 위신을 손상시켜서는...
한일관계사DB › 고려사 › 신우·신창
왕태후의 표문에 왜의 침입으로 토산말이 거의 다 없어져 충당하기 곤란하다고 적다.
…… 왕태후의 표문에 이르기를, ……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바닷가에 있고 왜국과 이웃하여 날마다 그들과 싸우고 있으므로 집정 대관이라고는 모두 다 장수로서 조정에 있는 사람이 적다. 만일 그 대신의 절반을 귀국에 보낸다면 국방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 만일 왜적이 제멋대로 침략하게 된다면 이는 우리나라의 불행을 가져 올 뿐만 아니라 귀국의 염려로도 되지 않겠는가? 또 우리나라에서는 본래 토지가 박하여 금은도 생산되지 않음은 귀국에서 아는...
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일기 › 광해군 5년 (1613)
사간원에서 왜인들의 왜관출입을 통제하지 않은 부산첨사 조안방 등을 국문하도록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왜인의 성격은 간사하기 그지없습니다. 간사하고 잗달은 무리들과 몰래 통하여 우리나라의 사정을 엿보는 것이 근래에 더욱 심해졌으니, 왜관에 거류하는 자들을 엄히 기찰하여 그 출입을 금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동래부사 이창정(李昌庭)의 서계를 보니, 왜관에 거류하는 왜인들이 명절이라는 이유로 공공연히 물가에다 천막을 치고 멋대로 놀았는데 부산첨사 조안방(趙安邦), 역관 이언서(李彦瑞)는 남의...
국역고려사DB › 제신(諸臣) › 이인기(李仁琪)
이인기李仁琪
이인기(李仁琪)는 계림(雞林)(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사람이다.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하였으며 풍모가 멋졌다. 또 예법에 익숙했으며 무예로 이름을 떨쳤다. 호군(護軍)으로 있으면서 중방(重房)의 장수들이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대놓고 욕을 하였더니 장수들이 충선왕에게 호소하였다. 충선왕은 이인기가 옳은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으나 장수들이 모두 원나라에서 온 근시(近侍)들과 한 패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이인기의 관직을...
국역고려사DB › 제신(諸臣) › 이영(李穎)
이영李穎
이영(李穎) 이영(?~1278) 본관은 인주(仁州)이며,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한 후 충렬왕 때까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한 문신관료이다. 이 집안은 고려전기의 대표적인 문벌이며 무인집권기에도 많은 관료를 배출하였으나, 원간섭기에는 이영과 공양왕 때 정당문학을 역임한 이원굉(李元紘) 등 두 명의 관료만 배출할 정도로 가세가 쇠퇴하였다. 이영의 가계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95, 열전8, 이자연전(李子淵傳) 참조.이수건, 『한국중세사회...
한일관계사DB › 조선왕조실록 › 선조실록 › 선조 27년 (1594) 8월
박충간 ․ 이남 ․ 이영의 체직과 항왜 작폐와 관련하여 당상관 ․ 낭청의 추고를 아뢰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진휼사 박충간(朴忠侃)은 나이도 많고 일 처리도 잘못하니 체직을 명하소서. 또 본청의 전 종사관 이남(李覽)이 초여름에 새해의 곡식을 수취하는 일로 호서에 내려갔으니 장차 진휼하는 일에 이어 사용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을이 깊어도 아직도 들여온 것이 없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사도시정(司䆃寺正) 이영(李瑩)은 사람이 혼매하고 용렬해서 총치하는 책임에 합당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