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 수복후에 여러 장수가 경성으로 모인 일과 행주산성의 대첩에 대해 기록하다.
처음에 평양이 회복되자 여러 장수들이 많이 경성으로 모여들었다. 중국군이 개성부에 진주하자 우리나라 장수들은 차례로 전진시켜 함께 기각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다. 전라도순찰사 권율(權慄)은 그의 군사 4천명을 반으로 갈라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거느...
-
접반관 이시발이 서계하여 진유격이 민충단에서 제사지낸 일을 아뢰다.
진유격(陳遊擊)의 접반관 이시발(李時發)이 서계하였다.
“오늘 유격이 홍제원(洪濟院)의 민충단(愍忠壇)민충단(愍忠壇)임진 왜란 때 우리 나라에 와서 싸우다가 죽은 명나라의 군사들을 불쌍히 여겨 지은 충혼단(忠魂壇).에 가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에 대...
-
상이 봉왜명사를 맞이하기 위해 모화관에 거둥하다.
인시에 상이 모화관에 거둥하였는데 봉왜명사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막차로 들어가 좌부승지 정구(鄭逑)에게 전교하기를,
“전에는 명사가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면 원접사가 즉시 종사관을 보내어 당도했음을 아뢰어 알렸으나 지금은 홍제원이 없고 시간도 늦...
-
병조판서 이덕형이 중흥동 산성을 둘러보고 주위의 형세를 그림으로 올리다.
병조판서 이덕형(李德馨)이 아뢰기를,
“신이 1일에 나아가 중흥동(中興洞)에 못 미쳐 촌막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동구에 이르러 서북쪽의 외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삼각봉(三角峰)이 높이 솟아 있고 그 곁에 두 봉우리가 차례로 나열해 섰으며, 성자는 끝...
-
군문 형개와 중국의 파병, 전란 상황 등을 논의하다.
상이 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형군문(邢軍門)을【이름은 형개(邢玠)이고 도호는 곤전(崑田)이다.】접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병화를 가혹히 입어 스스로 떨치고 일어날 수 없던 것을 중국이 재차 군사와 군량을 조발하여 종시 구원하여 주니...
-
진어사가 무를 숭상하여 국가를 회복할 것을 권하다.
상이 홍제원(弘濟院)에 행행하여 진어사(陳御史)를【감군어사(監軍御史)로 이름은 진효(陳效)이다.】영위하였다. 상이 막차로 들어가니, 왕세자가 사서 이필영(李必榮)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상이 눈과 얼음 위에 앉아 종일토록 기다렸는데 해질녘에야 어사가 도착하였...
-
형군문을 전별하면서 적의 간첩 ․ 둔전 ․ 수성 등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다.
상이 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형군문(邢軍門)을 전별하였다. 맞아들여 자리를 정하자, 군문이 말하기를,
“저번에 적추 가등청정(加藤淸正)이 포로가 된 중국 사람을 꾀어 거짓으로 나의 표첩을 만들고는 그들을 시켜 조선에서 정탐하다가 수원(水原)에 머...
-
진어사가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니 홍제원에서 전위하다.
진어사(陳御史)가 중국으로 돌아갔다. 상이 홍제원(弘濟院)에서 전위하였다. 어사가 말하기를,
“어제 조보를 보니 ‘가등청정(加藤淸正)과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군량이 다하여 물러갈 형세가 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오직 전...
-
홍제원에서 양경리를 위로하다.
상이 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양경리(楊經理)를 전위하였다. 경리는 베로 만든 옷과 두건을 착용하였고【올 때는 기복된 장관의 위의가 있었는데, 돌아갈 때는 회적하는 효자의 상복 차림이었다.】모습은 야위었다. 상이 의례대로 맞이하여 배례하고 말하기를,
...
-
홍제원에서 형군문을 격려하고 양경리의 억울함을 이야기하다.
상이 홍제원(弘濟院)에 거둥하여 형군문(邢軍門)을 맞아 위로하였다. 왕세자가 필선 황정철(黃廷哲)을 보내어 문안하였다. 미시에 군문이 도착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이 다시 오시니 이는 소방의 복입니다.”
하니, 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