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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자2020한일관계사연구본고에서는 한국과 일본에서 지금까지 논의되었던 임진・정유재란의 전쟁 원인에 대해 최근 일본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정유재란 발발배경으로 논의되고 있는 일본 측의 ‘조선왕자의 來日 문제’를 하데요시가 필리핀諸島長官에게 보낸 서장을 통해 ‘조선 남부 경상도지역의 영토 확보와 무역재개’와 관련 있음을 고찰하였다. 또한 전쟁 발발 전후로 히데요시가 발급한 문서를 보면 임진왜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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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2019한일관계사연구광복 이후 1990년대까지의 임진왜란 연구는 의병에 관한 성과가 풍부하지만, 전쟁 극복의 주요한 주체 중의 하나인 관군에 대한 연구가 부진했다. 이는 전쟁 당시 관군의 허약성과 조선 정부의 무능력한 전쟁 대응 능력을 보여주는 부정적인 시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 임진왜란에 대한 기존 인식의 재검토를 제기한 성과를 시작으로 관군의 전쟁 대응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연구가 활발히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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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자2013한일관계사연구본고에서는 일본 NHK 대하드라마에서 히데요시 주연의 작품 ?秀吉?(1996년)을 통해서 1990년대 후반 TV역사드라마에서 일반대중들에게 보여주려 했던 히데요시像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았다. 이 시기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대변되는 경제적인 침체기로 히데요시를 ‘현대적인 시점’에서 재조명하면서,샐러리맨들(일반인)에게 ‘꿈을 가지고 자기 목표를 실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그 과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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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자2012한일관계사연구임진왜란은 7년 전쟁 기간 중 5년 1개월을 ‘휴전’상태에서 조선과 일본, 일본과 명 사이에서 강화교섭, 즉 외교전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진행되어왔던 ‘일·명, 조·일강화교섭’가운데 특히 조선왕자 송환문제에 깊게 관여했던 기요마사의 활동을 중심으로(서생포 회담)그가 조선과의 강화교섭에 등장하게 되는 배경, 동시에 왕자 송환문제가 이후 전쟁 중의 강화교섭에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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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덕기2012한일관계사연구히데요시가 對馬島主 宗儀智에게 조선 침략의 뜻을 처음으로 표명하는 것은 1586년 6월의 일이다. 규슈를 평정하고 나면 조선으로 들이닥칠 터이니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다음해 6월엔, 20만의 정벌군으로 규수에 출정나각 히데요시가 대마도주에게 조선국왕의 직접 來朝를 명령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국왕이 대마도주에게 복속된 존재로 히데요시가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선국왕의 來朝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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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덕기2010한일관계사연구임진왜란으로 일본은 조선의 ‘불구대천지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줄곧 通信使 파견을 요청해 오자 조선은 마침내 ‘2件’을 제시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강화 요청 서한을 조선에 먼저 보내라는 것이고(先爲致書),왜 란 중에 조선 왕릉을 파헤친 일본군을 압송하라는 것이었다(犯陵賊縛送).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겨놓은 대외적 과제를 청산하고 막부의 권위를 높여줄 유일한 나라로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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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광2008한일관계사연구2008년에 사용될 일본 고등학교 역사교과서 6종에서 기술된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을 분석했다.교과서에 기술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전쟁의 배경으로 표현상에는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궁극적으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위한 명나라 정복 야망을 대표적인 이유로 들고 있다.부분적으로 무역 부활,내부적 모순의 대외적 표출 등을 언급한 교과서도 있기는 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