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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2018본 연구는 우암 송시열이 유배형을 받고 제주에 왔다가 정읍에서 사사될 때까지 저술활동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교육적 의의를 밝혔다. 그는 제주에서 111일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제주 오현의 마지막 인물로 오현을 완성하면서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시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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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2015동아시아 문화연구이 논문은 한 외국인 화가의 삶이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기억으로 남는 과정을 살폈다. 명청교체기 關外에서 활동하던 명나라[漢族] 화가 孟永光은 조선의 마지막 對明使行이된 金堉을 만나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후 명나라 장수가 청에 항복하면서 孟永光은 포로가 되어 瀋陽으로 끌려간다. 그는 그곳에서 인질로 끌려온 조선의 왕자들과 만나게 되고, 왕자를 보필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들, 그리고 청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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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해2012한국문화연구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구곡을 개창하고 학문과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만동묘는 조선왕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고, 화양서원과 함께 노론들의 본거지로 자리하고 있었다.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만동묘는 송시열이 은거하던 곳에 건설하고 있다. 만동묘는 중국의 황제를 배향한 반면에 화양서원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배향하고 있다. 따라서 만동묘는 풍수적 길지론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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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2011泰東古典硏究본고에서는 장흥의 선비 존재 위백규의 <기해의례변>과 <춘추대의변>을 중심으로 기해예송과 송시열의 춘추대의를 둘러싼 논의를 위백규가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했고 기억했는지 살펴보았다. 위백규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년~1767년)의 제자였다. 윤봉구는 송시열의 제자인...춘추대의변>기해의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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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2011지방사와 지방문화인간의 삶과 역사에서 논쟁은 보편화된 일상으로, 소통의 한 방식이다. 인간은 논쟁을 통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 대한 비판과 수용을 하며, 인식을 수정 또는 확정한다. 조선시대의 주요한 정치적 문제인 '黨議' 또한 이러한 논쟁의 측면에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17세기는 논쟁이 치열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17세기는 '논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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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2011古文書硏究조선 후기 호남사회는 16세기에 이어 17세기에도 己丑獄事 뿐만 아니라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李珥와 成渾의 文廟從祀, 禮訟 등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었는데, 점차 西人과 老論의 우세속에 전개되어 갔다. 광주의 순천박씨 가문은 이러한 과정을 결정짓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광주의 순천박씨 가문은 17세기에 들어서 문중조직이 크게 성장하였다. 1660년대에 과거합격자를 다수 배출하면서 광주 入鄕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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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조2010한국학논총이 논문은 조선시대 수백 년간에 걸쳐 朝野에서 논의되었던 死六臣평가문제를 다룬 글이다. 사림은 儒學的 義理名分에 기초하여 사육신을 현실에서 그것을 실천한 인물로 추앙해 왔다. 그러나 왕실의 입장에서는 조상인 世祖를 깎아 내리고 임금 자신의 정통성을 흔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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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산2008기전문화연구김창협은 훗날 낙론계의 종장으로 인식되면서 그의 사유는 노론 전반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김창협 학문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김상헌 ․ 송시열을 통해서 주자학과 의리학 학풍에, 나성두 ․ 조성기 ․ 이단상을 통하여 邵雍 象數學의 학문성향에,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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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융희2008장서각이 논문에서는 조선후기에 '풍천(風泉)'이 조선 고유의 문학적 술어로 관습화되는 과정을 구명하였다. 『시경(詩經)』의 「비풍(匪風)」과 「하천(下泉)」을 축약하여 만들어진 '풍천'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이 명을 높이고 청을 배척하고자 하는 정치적 논리를 마련하는 가운데 탄생된 신조어였다. 이 술어에 대한 검토는 조선 특유의 역사적 국면이 문학적 전개 양상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는 데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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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2007This study is research for Confucian Ritualism(禮敎, rule of li) as a key understanding thoughts, an ethic, politics in 17c Chosun Dynasty(13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