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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숙2022한국학In this paper, I analyzed and reviewed the formative characteristics of the calligraphic style that appeared in gentry men’s Hangeul corres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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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2022東洋學No-Bong, the nickname of Min Jeong-Joong(1628~1692), was a scholar and politician lived in Hyojong~Sookjong reign, Late Joseon. He was a disc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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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혁2022동서철학연구The paper is research for the development and character of the Lixue of Geumgang Culture Area in the mid-Joseon Dynasty. The Geumgang Cultura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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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균2021국학연구해운정은 어촌漁村 심언광沈彦光(1487~1540)이 강릉에 조성한 경호별업의 누정이다. 해운정에는 심언광이 접반사로 명사明使 공용경龔用卿(1500~1563)·오희맹吳希孟을 수행하면서 이들에게 받은 시문과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시문들이 보장寶藏·게판揭板된다. 강릉에 오는 인사들은 해운정을 찾아 명사와 송시열의 시문에 화답하면서 그 유훈을 추념한다. 이 시문들은 해운정을 문화 공간으로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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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태2018본 연구는 우암 송시열이 유배형을 받고 제주에 왔다가 정읍에서 사사될 때까지 저술활동을 중심으로 그가 남긴 교육적 의의를 밝혔다. 그는 제주에서 111일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제주 오현의 마지막 인물로 오현을 완성하면서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시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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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2015동아시아 문화연구이 논문은 한 외국인 화가의 삶이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다양한 기억으로 남는 과정을 살폈다. 명청교체기 關外에서 활동하던 명나라[漢族] 화가 孟永光은 조선의 마지막 對明使行이된 金堉을 만나 초상화를 그려준다. 그후 명나라 장수가 청에 항복하면서 孟永光은 포로가 되어 瀋陽으로 끌려간다. 그는 그곳에서 인질로 끌려온 조선의 왕자들과 만나게 되고, 왕자를 보필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들, 그리고 청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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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해2012한국문화연구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받아 화양구곡을 개창하고 학문과 휴식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만동묘는 조선왕조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고, 화양서원과 함께 노론들의 본거지로 자리하고 있었다.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만동묘는 송시열이 은거하던 곳에 건설하고 있다. 만동묘는 중국의 황제를 배향한 반면에 화양서원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배향하고 있다. 따라서 만동묘는 풍수적 길지론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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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2011泰東古典硏究본고에서는 장흥의 선비 존재 위백규의 <기해의례변>과 <춘추대의변>을 중심으로 기해예송과 송시열의 춘추대의를 둘러싼 논의를 위백규가 그 사실을 어떻게 이해했고 기억했는지 살펴보았다. 위백규는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1년~1767년)의 제자였다. 윤봉구는 송시열의 제자인...춘추대의변>기해의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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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2011지방사와 지방문화인간의 삶과 역사에서 논쟁은 보편화된 일상으로, 소통의 한 방식이다. 인간은 논쟁을 통해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 대한 비판과 수용을 하며, 인식을 수정 또는 확정한다. 조선시대의 주요한 정치적 문제인 '黨議' 또한 이러한 논쟁의 측면에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17세기는 논쟁이 치열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17세기는 '논쟁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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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2011古文書硏究조선 후기 호남사회는 16세기에 이어 17세기에도 己丑獄事 뿐만 아니라 중앙의 정치적 변화에 따라 李珥와 成渾의 文廟從祀, 禮訟 등에 관한 논쟁이 계속되었는데, 점차 西人과 老論의 우세속에 전개되어 갔다. 광주의 순천박씨 가문은 이러한 과정을 결정짓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광주의 순천박씨 가문은 17세기에 들어서 문중조직이 크게 성장하였다. 1660년대에 과거합격자를 다수 배출하면서 광주 入鄕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