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괴담(槐潭) 배상열(裵相說, 1759~1789)의 문집이다. 저자의 형 상현(相賢)이 난고(亂稿)를 일부 수습 편차하여 정서하였고, 아들 현두(顯斗)가 부친의 저서 정리 작업을 계속하여 조술도(趙述道)에게 서문을, 정종로(鄭宗魯)에게 묘지명을 받은 뒤 김희분(金煕奮)에게 문집을 감정(勘正) 받아 1811년 목…
조선 시대 갈천(葛川) 김희주(金煕周, 1760~1830)의 문집이다. 서발(序跋) 등 간행 경위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없고, 다만 5대손 응환(應煥)의 연보발(年譜跋)에 의하면 1903년 간행 당시에 가장(家藏)되어 있던 저자의 원고(原稿) 가운데 반 정도를 산삭(刪削)하고 50부만 인출하여 반질(頒帙)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성재(誠齋) 남한호(南漢皜, 1760~1821)의 문집이다. 본집은 아들 식정(植正)에 의해 수집 편차(編次)되어 조승수(趙承洙)에게 행장(行狀)을, 유치명(柳致明)에게 묘갈명(墓碣銘)을 받았으나 서발문(序跋文) 등 관련 기록이 없어 정확한 간행 경위를 알 수 없고, 다만 문인(門人) 황원선(黃源善)의 제문(…
조선 시대 도계(陶溪) 윤홍규(尹弘圭, 1760~1826)의 문집이다. 이돈영(李敦榮)의 묘갈명과 조석우(曺錫雨)의 서문에도 문집에 대한 언급이 없고 다만 1875년 족손 자덕(滋悳)이 쓴 행장에 “저자의 유집 몇 권이 가장되어 있다.”라고 하였지만, 언제 누구의 편차와 교감을 통해 문집을 간행하였는지는 불명확하다. 그…
조선 시대 좌소산인(左蘇山人) 서유본(徐有本, 1762~1822)의 문집이다. 서발문이나 사기(寫記) 등의 관련 기록이 없어 명확한 편사(編寫) 경위를 알 수 없고, 다만 괘인지(罫印紙) 판심 하단 우측에 필사되어 있는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이, 서유구가 1837년 ‘자연경실장(自然經室藏)’ 괘인지를 쓰기 전까지 사…
조선 시대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 1762~1834)의 문집이다. 본집은 손자 주목(疇睦)이 1840년 가장유고를 수습하고 유문을 모아서 저자의 문인들과 수차례 고증 교수하여 10편으로 정리한 다음, 사림의 협조를 받아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에서 문집을 판각하였으나, 바로 인출하지 않고 다시 수정을 거쳐 …
조선 시대 수재(壽齋) 이곤수(李崑秀, 1762~1787)의 문집이다. 본집은 부친 성원이 수습 정리한 유문을 1789년 정조의 명으로 내각에서 운각인서체자(芸閣印書體字)로 인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집은 8권 3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에는 총목이 있고, 권마다 권목이 있다. 권1은 응제록으로 왕명으로 지은 글들이다. …
조선 시대 질암(質菴) 최벽(崔璧, 1762~1813)의 문집이다. 본집은 아들 제석(濟奭)이 수습 정리한 것에, 족제 옥(沃/玉)의 서문과 1930년 이중철(李中轍)의 서문을 받고, 족현손 현필(鉉弼)의 발문을 받아, 현손 해규(海奎)가 경주(慶州)의 용산단소(龍山壇所)에서 활자로 문집을 인행하였다. 본집은 6권 4책…
조선 시대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 1763~1837)의 문집이다. 본집은 차자 기목(祈睦)이 가장을 짓고 삼자 교목(敎睦)과 손자 도성(道性)이 수집 편차하여 유상조(柳相祚)에게 묘지명과 이휘재(李彙載)에게 행장, 이종상(李鍾祥)에게 묘갈명을 받아 1902년경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집은 20권 10책으로 …
조선 시대 일포(逸圃) 박시원(朴時源, 1764~1842)의 문집이다. 아들 종교(宗喬)가 지은 가장을 바탕으로 유치명(柳致明)에게 행장을, 강필효(姜必孝)에게 묘갈명을 받아 저자의 유적을 정리하였다. 이후 영천의 사림들이 유문을 부집(裒輯)하고 이휘녕(李彙寧)의 발문을 받아 문집을 활자로 인행하였다. 본집은 8권 4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