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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炯周2021한일관계사연구본 연구는 1794년 재판(裁判) 히라타 아사에몬(平田淺右衛門)의 대리인(名代)으로 조일 교섭에 투입된 가와치 도쿠자에몬(河內德左衛門)의 사례를 통해, 18세기 말을 전환점으로 하여 재판의 대리인 파견이 급증하는 이유를 재고하려는 것이다. 18세기 말 이후 19세기까지 재판의 대리인 파견이 급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실제로 재판의 업무 적합한 인물을 임명하기 위해 취해진 편의상의 조치라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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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芝銀2019한일관계사연구왜관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식적인 소통과 접촉을 위해 허용된 공간이었다. 한편, 조선인과 일본인의 접촉과 소통을 막기 위해 구분된 공간이라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인이 왜관을 출입하려면 동래부사의 허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은 비공식적으로 빈번하게 왜관을 방문했다. 일본인은 왜관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예고도 없이 무단으로 왜관을 방문하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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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2018한일관계사연구조선시대 대일(對日) 외교와 무역의 실무를 맡은 사람들은 왜학역관(倭學譯官) 또는 왜어역관(倭語譯官)으로 불린 조선 정부의 일본어 통역관들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통역 역할을 넘어 외교와 통상의 전문가로서 활약하였다. 이 글에서는 왜관의 일본인이 작성한 『관수일기(館守日記)』와 그것의 목록집이라 할 수 있는 『분류사고(分類事考)』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분석 기간은 1854년부터 1863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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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현2018한일관계사연구부산의 개항과 개항장에 설치될 일본인 거주지를 둘러싸고 조선과 일본은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먼저, 조선과 일본은 개항과 더불어 개항장에 설치된 외국인 거주지를 ‘조계’와 ‘거류지’로 대별하여 사용했다. 일본이 처음부터 끝까지 ‘거류지’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과 달리 조선은 공식적인 명칭으로 줄곧 ‘조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조계’를 사용하지 않고 ‘거류지’를 사용한 원산과 마산의 경우, 모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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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2018열상고전연구1687년 9월부터 1870년 윤 10월까지 왜관(倭館)의 일본인 관리자인 관수(館守)가 작성한 일지(日誌)를 가리켜 『관수일기』라 부른다. 이 글에서는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된『관수일기』의 개요와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소개하였다. 『관수일기』는 조선과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이루어지는 현장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있다. 따라서 『관수일기』를 활용한다면 조선 후기 한일관계사의 다양한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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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순2016한일관계사연구본 연구는 왜관에서 조선여성과의 교간이 발각되어 對馬藩으로 압송된 범죄 일본인이 對馬藩에서 조일 간에 약조로 합의된 범죄자 처벌규정에 입각하여 처리되었는지 살펴보고, 교간사건에 대한 양국의 인식과 그 대처 양상은 어떠했는지를 밝혀보는데 목적이 있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에 조선측은 왜관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조선인 여성을 왜관으로 끌어들여 성관계를 한 사실(교간)이 발각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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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일2016한일관계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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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명철2016한일관계사연구기유약조 체제가 붕괴되는 과정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조선의 외교 능력과 동래부의 교섭 태도에 대한 철저한 멸시로 일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메이지 일본이 우호를 요청하였으나 쇄국을 고집하는 조선이 사소한 자구를 문제삼아 거절을 반복’하였다는 이미지를 부각시켰고, 모든 외교적 갈등을 조선의 책임으로 돌렸다. 본고에서는 동래부에 시점을 두고 출입국 선박에 대한 문정과 동래부의 보고를 토대로 연표를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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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대수2016일본학연구본고는 1695년 1월 23일 이즈모(出雲) 간도군(神門郡) 사기우라(鷺浦)에 표착시 사망한 김옥복(金玉福)의 유해가 함께 표착한 일행과 더불어 조선에 돌아오지 못하고, 약 1년 8개월 뒤인 1696년 9월 18일에서야 송환된 사건에 대해 검토한 것으로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누어 김옥복 시신 송환과정을 분석하였다. 첫째 ‘조선에 송환된 표류민 사망자’ 에서는 1695년 1월 23일 이전 일본에 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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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흥숙2015한국민족문화영도는 부산광역시 내에서 육지와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유인도이고 하나의 자치구를 이루고 있다. 근대 이후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인구 밀집지역이 되었고 관련 연구성과도 나왔지만, 근대 이전 특히 조선시대의 영도에 대해서는 별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국영 목장, 봉산으로 사용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없는 곳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존재한 것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