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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돈녕부사 이산해 등이 왜적이 퇴각한 기쁨을 아뢰다.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해원부원군 윤두수(尹斗寿), 행지중추부사 정탁(鄭琢) 등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왜적과 7년 동안 대치하고 있었지만 왜적의 진영 하나도 섬멸하지 못하고 적추로 하여금 버젓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으니, 원통하고 분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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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반사 한술이 낭중 가유약이 지은 부산평왜비명의 초고를 올리다.
6614. 접반사 한술이 낭중 가유약이 지은 부산평왜비명의 초고를 올리다.
낭중 가유약(賈維鑰)의 접반사 한술(韓述)이 장계하였는데, 낭중이 지은 부산평왜비명(釜山平倭碑銘)의 초고를 베껴서 올려 보낸다는 것이었다.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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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문에 왜란을 겪은 후 병력이 감축되어 7천명을 다 보낼 수 없는 이유를 적어 보내다.
격문에 답한 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왕은흠차총독계요보정등처군무겸리양향경력어왜병부좌시랑겸도찰원우첨도어사(欽差總督薊遼保定等處軍務兼理粮餉經略禦倭兵部左侍郞兼都察院右僉都御史) 왕(汪)으로부터 ‘우리 대명의 위령 운운’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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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조정에 왜인들이 약조를 준수하지 않고, 해관의 왜인도 천명에 이른다는 자문을 보내다.
중국 조정에 보낸 자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왕 신 성 모는 ‘귀순한 오랑캐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자 천토를 가하려 하는 이때 거듭 총독과 순무의 자문과 격문을 받고 소방의 군병을 조발하고 정비하면서 공손히 명지를 기다리는 일’ 에 관하여 삼가 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