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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26년(1196) 병진년
26년 봄 정월
정유일. 금나라에서 가익(賈益)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대관전(大觀殿)에서 금나라 사신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2월
정묘일. 개경에 지진이 발생했다.
임신일. 추밀원사(樞密院事) 이준창(李俊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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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논평
사신(史臣)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의민(李義旼) 등이 의종(毅宗)을 시해(弑害)하고, 국권(國權)을 농단했으니, 명종이 취할 계책은 스스로 마음을 굳세게 먹고 반드시 역적을 처단하고야 말겠다는 뜻을 세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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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3년(1200) 경신년
3년 봄 정월
초하루 무자일. 신년 하례행사를 생략하였다.
○ 예빈소경(禮賓少卿) 백원식(白元軾)을 금나라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게 했다.
기유일. 최충헌(崔忠獻)이, 전국에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을 감형시켜 주고 또한 유배 중인 죄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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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6년(1203) 계해년
6년 봄 정월
초하루 신미일. 신년 하례행사를 생략했다.
기축일. 왕이 신중원(神衆院)에 행차했다.
을미일. 왕이 수문전(修文殿)에서 친히 제석도량(帝釋道場)을 열었다.
2월
을사일. 왕이 법운사(法雲寺)에 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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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논평
사신(史臣)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신종은 최충헌이 세운 임금으로서, 사람들의 생사와 관리의 임명 등 모든 일이 최충헌의 손에서 나왔다. 왕은 다만 이름뿐인 왕위를 차지하고 신하들과 백성들의 위에 있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참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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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종 2년(1206) 병인년
2년 봄 2월
기미일. 신종(神宗)의 신위를 태묘(大廟)에 합사[祔 부제 국상(國喪)을 마친 뒤에 그 신주를 그의 조상 곁에 모실 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했다.
여름 4월
갑자일. 금나라에서 대리경(大理卿) 이자광조(移刺光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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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논평
사신(史臣)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당시 최충헌이 국권을 장악한지 이미 여러 해가 된지라 자기 일당들을 도처에 심어놓고 상벌을 제 마음대로 내렸으니 희종이 비록 올바른 정치를 하려해도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왕이 할 수 있는 계책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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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의 논평
사신(史臣)의 논평은 다음과 같다.
“강종이 임금으로 있으면서 모든 정무는 권신의 견제를 받았고 갑자기 병들어 나라를 다스린 햇수도 짧았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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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4년(1217) 정축일
4년 정월
경진일. 나무꾼들이 태묘(太廟)의 소나무를 베어내는 바람에 묘역이 민둥산이 되어 버렸다. 군사들을 시켜 감시하게 했으나 막아내지 못했다.
갑신일. 금나라의 내원성(來遠城)에서 우리 영덕성(寧德城)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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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8년(1221) 신사년
8년 봄 2월
기사일. 연등회 참석차 왕이 봉은사에 갔다.
3월
신묘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다.
무술일. 의주의 반적인 윤장(尹章) 등 세 명을 체포해 칼을 씌워 큰 거리에서 조리돌렸다.
신축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