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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오르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이 시신들을 보고 엎드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흙같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東坡)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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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잡과 적의 형세와 평양으로 옮길 일을 논의하다.
신잡(申磼)이 돌아왔다. 상이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적세가 어떠하던가?”
하니, 잡이 아뢰기를,
“유시 말에 혜음령(惠音嶺)에 도착했다가 도로 동파(東坡)로 왔는데, 이각(李珏) · 성응길(成應吉) 등이 적을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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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이 동파로 물러나 머무르다.
중국군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고 제독의 가정 중 아주 신임하는 자 1명도 죽었는데 제독이 말 위에서 통곡하였습니다.
28일 이른 아침에 동파(東坡)로 물러나 주둔하려 하므로 신이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접대사 이덕형(李德馨), 호조판서 이성중(李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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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원에서 이덕형 등을 인견하고 중국군의 무기, 군량, 병력 등을 논의하다.
미시에 상이 운암원(雲巖院)에 나아가 지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우승지 유몽정(柳夢鼎), 주서 심언명(沈彦明), 대교 조수익(趙守翼), 검열 조유한(趙維韓)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독이 무엇 때문에 회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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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이 경성의 포위 상황을 아뢰며 왜적이 합세하기 전에 토벌하자고 청하다.
도체찰사 풍원부원군 유성룡(柳成龍)이 치계 하였다.
“경성에 있는 적의 무리가 12일의 행주 전투로 인하여 사망자가 매우 많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도망해 돌아온 사람들의 말이 모두 같습니다. 15일에 충청수사 정걸(丁傑)이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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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이 서울로 진병하도록 제독에게 자문을 보내도록 전교하다.
상이 비변사 및 삼사를 인견하였다.【인성부원군 정철(鄭澈),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 호조참판 윤자신(尹自新), 창산군 성수익(成壽益), 병조참판 심충겸(沈忠謙), 교리 이유중(李有中), 지평 신흠(申欽), 정언 송영구(宋英耈)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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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 등이 경략의 패문과 왜적을 치자고 쟁변한 내용을 아뢰다.
도체찰사인 풍원부원군 유성룡(柳成龍)과 도원수인 좌참찬 김명원(金命元)이 치계 하였다.
“금일 총병 이녕(李寧)과 유격장 척금(戚金) · 전세정(錢世禎)이 동파(東坡)에 와서 총병 사대수(査大受)와 한곳에 있으면서 신들과 순찰사 이정형(李廷馨)을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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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룡이 도성의 피폐함을 아뢰다.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치계 하였다.
“어제 제독이 동파(東坡)로부터 입성하였고 신은 저녁나절에 뒤이어 성중에 들어가니, 왜적은 모두 이미 물러갔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가 뒤를 따르면서 호위하였으므로 제군이 감히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모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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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때이지만 상복을 입고 상례를 따를 것을 명하다.
상이 이르기를,
“환도할 때 보니, 경성의 백성들 중에 상복을 입은 자가 없었다. 흉악한 적들에게 죽은 자가 필시 많을 것인데 상복을 입지 않았기에 괴이하게 여기고 전교하였었다. 비록 전쟁 때라지만 법사에서는 규정하여 상복을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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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의 경호 문제, 중국군의 남방 방어 문제, 서울의 내성 수축 문제를 논의하다.
상이 별전에 나아가 대신 및 비변사 유사당상인 영돈녕부사 이산해(李山海),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행판중추부사 윤두수(尹斗壽), 좌의정 김응남(金應南), 행지중추부사 정탁(鄭琢), 행형조판서 김명원(金命元), 병조참판 노직(盧稷)을 인견하였는데, 우부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