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라다라를 제포에 머물러 둘 것인가를 의논하였는데 후일에 결정하기로 하다.
안당(安瑭)·이계맹(李繼孟)·이우(李嵎)·최관(崔灌)·최인(崔潾) 등이 의논드리기를,
“이라다라(而羅多羅)가 본래 처도(妻島)에 살며 수직하였고, 본조에 내왕할 때에 아내를 얻어 포에 머무를 뿐이니 항거하는 자와 똑같이 볼 수 없고, 비록 조금 지략이 …
-
왜노에 대한 처치를 의논하여 모두 놓아 보내어 은혜를 베풀게 하다.
상이 전일의 왜노 처치하는 의논을 도로 들이라고 명하니, 대간의 의논을 따른 것이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 일의 처치는 한번 정당함을 잃으면 다시 고칠 수가 없으니, 청컨대 윤허하신 의논대로 정부와 방어청에 보이소서.”
하…
-
왜인을 놓아 보내는데 이라다라만은 남겨두기로 하다.
김수동·유순정·성희안·홍경주·신용개·정광필 등이 아뢰기를,
“왜변이 지금은 비록 조금 지식되었으나, 다시 와서 노략질하지 않을 것을 어찌 보증하겠습니까? 충주에 가둔 왜인이 도중에서 모두 우리나라의 군사 기밀을 알았으니 놓아 보낼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
-
정원이 경솔히 왜인을 놓아 주었으니 그에 대한 대비를 의논하자고 청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전일에 이라다라(而羅多羅) 등을 들여보내는 일에 대하여 조정이 의논을 이미 정하였으나, 옳지 않다고 하는 물론이 많으므로 정광필(鄭光弼)이 이것으로써 다시 아뢰어 잠깐 유치하게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라·삼…
-
시독관 홍언필이 왜인 붕중의 인물됨을 말하다.
석강에 나아갔다. 시독관 홍언필(洪彦弼)이 아뢰었다.
“신이 연전에 붕중을 가 보니 그 위인이 재능이 많고 영리하고 교활하며 모든 글을 박람하였습니다. 그 나라에서 그를 택하여 보냄은 필시 우리나라의 허실을 엿보려는 것입니다. 연전에 왔을 때 사예·방화…
-
집의 김양진이 경상도 군졸의 윤번에 대해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사간 이자(李耔)와 집의 김양진(金楊震)이 전의 일을 반복하여 논계하고, 양진이 또 아뢰기를,
“경상도는 한번 왜란을 겪은 뒤로 군졸이 감소되고 수군의 폐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육군에 있어서는 비록 3번으로 나누었다 해도 교대할 때…
-
정언 신잡이 왜국 사신이 충주에서 하인에게 구타당한 일로 목사의 파직을 청하다.
정언 신잡(申磼)이 와서 아뢰기를,
“국가가 먼 나라 사람을 접대하는 데는 의당 후해야 하는데, 왜국의 사맹 평렴계(平廉繼)가 충주에서 하인에게 구타를 당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본주의 목사와 판관을 아울러 파직하소서.”
하니, 아뢴 대…
-
신립이 충주에서 패배하다.
신립(申砬)이 충주에 이르렀을 때 제장들은 모두 새재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입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고 하였다. 27일 단월역(丹月驛) 앞에 진을 쳤는데 군졸 가운데 ‘적이 벌써 충주로 들어왔다.’ 고 하는 자가 있자, 신립은…
-
충주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파천을 의논하다.
충주에서의 패전 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 대신 이하 모두가 눈물을 흘리면서 부당함을 극언하였다. 영중추부사 김귀영(金貴榮)이 아뢰기를,
“종묘와 원릉이 모두 이곳에 계시는데 어디로 가시겠다…
-
승려 무학이 지은 도참기에 나오는 귀절과 도성의 동요가 유행하다.
국초에 승려 무학(無學)이 지은 도참기(圖讖記)에 역대 국가의 일을 말했는데, 임진년(1592)에는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 란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자년·기축년으로부터 세상에 행해지다가 임진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