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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독 접반사 장운익이 중국군의 동정을 보고하다.
10월 17일에 성첩한 제독 접반사 장운익(張雲翼)의 장계에,
“제독이 15일 전주(全州)에 당도한 일은 이미 장계를 올렸습니다. 16일에는 전주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임실에 이르러 유숙하고 남원에서 15리 떨어진 지역에 이르렀는데, 이부총(李副摠)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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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참판 정광적이 중국군에 대한 군량 조달의 어려움을 보고하다.
호조참판 정광적(鄭光績)이 아뢰기를,
“영·호남의 읍들이 새로 병화를 겪어서 도륙을 당한 참상이 임진년보다도 심합니다. 곡식이 논두렁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수확해다가 중국군을 접대하기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방책이 없습니다. 부득이 미리 행군하는 시기를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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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동작진에 거둥하여 제독 마귀를 맞아 위로하다.
상이 동작(銅雀) 강가에 거둥하여 마제독(麻提督)을 맞아 위로하였다. 제독이 날이 저물어서야 당도하였는데 상이 맞아 장막 속으로 들어가서 절을 청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교외이니 읍으로 합시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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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감사 황신이 의병장 이선문 ․ 장인 박은상의 전과를 치계하다.
전라감사 황신(黃愼)이 치계하였다.
“의병장 이선문(李善問)의 치보에 ‘적의 무리가 우산(牛山) · 가천(可川) · 유산(遊山) 등처에서 분탕질하는 것을 장인(匠人) 박은산(朴銀山)이 머리 1급을 베었다.’ 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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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황신이 전라도의 적정과 영남으로의 군사 이동의 부당성을 진언하다.
전라도관찰사 황신(黃愼)이 치계하였다.
“본도의 적세가 점차 철수하여 물러가는 듯하지만 장흥(長興)과 보성(寶城)의 적은 낙안(樂安)의 적진에 합세하고, 순천(順天)과 흥양(興陽)의 적도 군사를 나누어 낙안에 목책을 쌓고 집을 지으면서 날마다 곡식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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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적정과 승전보, 패주 수령의 처리 등을 아뢰다.
전라도관찰사 황신(黃愼)이 치계하였다.
“운봉현감(雲峯縣監) 남간(南侃)의 치보에 ‘현감이 단기(單騎)로 황산(荒山)의 비전(碑殿) 앞길을 지나던 중 갑자기 흉적 40여 명을 만나 진퇴양난이 되었는데, 자신을 생각치 않고 활을 쏘아 두 명의 왜적을 맞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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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이 의병장 소희익 등이 남녀를 쇄출한 기록을 정문과 함께 보내다.
전라도관찰사 황신(黃愼)이 치계하였다.
“의병장 소희익(蘇希益)은 순천(順天)의 왜적 둔거지를 야경하면서 개유하여 남녀 286명을 쇄출(刷出)하였고, 낙안(樂安)의 접견 때도 개유하여 남녀 127명을 쇄출하였습니다. 도원수의 별장 김운성(金雲成) 등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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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학 신식이 전라도의 관군 ․ 의병의 실태 및 백성 안정책을 건의하다.
부제학 신식(申湜)이 전라도에서 올라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윤음을 받들고서 장사와 군민들을 선유하고 방어에 대한 형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병사 이광악(李光岳)과 방어사 원신(元愼)이 함께 남원(南原)에 주둔해 있는데, 처음부터 주둔할 병영이 없이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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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황신이 구덕령 등이 왜적 30여 명과 싸워 이긴 내용을 보고하다.
전라도관찰사 황신(黃愼)이 치계하기를,
“별장 구덕령(具德齡)이 9명을 거느리고 남해도(南海島)에 가서 칡뿌리를 캐는 왜적 30여 명을 만나 공격하여 사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거의 다 잡았습니다. 화살에 맞은 한 명의 왜적이 뒤쳐져 가는 것을 별장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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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유격의 관소에 거둥하여 전라도 적정에 대해 이야기하다.
상이 시유격(柴遊擊)의【이름은 시등과(柴登科)이다.】관소에 거둥하여 접견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천병이 쉽게 조발되지 못해 제때에 나오지 못하였기 때문에 울산 싸움에서 군대가 힘이 모자라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황상께서 진노하시어 …